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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12.02 사탕 한 상자
  3. 2019.02.08 요만한 새끼 헌터
  4. 2019.01.29 천칭
  5. 2019.01.26 넬로피 해시
  6. 2019.01.25 해빙
  7. 2019.01.21 우리는 순간을 말하게 될 거야
  8. 2019.01.21 BIRTH
  9. 2019.01.20 페넬로페 러빙
  10. 2018.10.29 소년들

범람 후에

2020. 5. 2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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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 한 상자

fixed star/싹 2019. 12. 2. 17:19

 

기실 나는 이 아가씨에 대해 아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고, 보이는 것처럼 얼굴이 아름답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치장해 놓았으나 결국 밖에서 보낸 태생의 탓일까?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러빙 씨의 실패작이라고…….

 

쉬쉬하였으나 저택을 발칵 뒤집어 놓고 쫓겨나듯이 기숙학교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계모인 러빙 부인에게 해꼬지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결국 남작부인의 방에서 그녀를 내쫓아 버린 것을 보면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저택의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페넬로페 러빙을 무시하거나 모른척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장밋빛 뺨의 소녀는 예뻤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나를 고용한 것이 되는 러빙 씨의 딸이기도 했다. 없는 사람처럼 지나가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저택에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페넬로페 러빙 하나밖에 없었다. 날은 화창하고 하늘은 푸르고 정원의 장미 향기는 짙어지는데 내가 이곳에 와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은 표정이 없었고 몸짓이 부자연스러웠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택은 침묵과 권태에 잠겨 있었다. 그게 귀족적인 저택의 미덕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숨이 막혔다. 태엽인형 사이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페넬로페 러빙이 제대로 된 의복도 갖추지 않고 맨발에 잠옷 차림으로 정원에서 장미 덤불의 뿌리를 파헤치고 있을 때 보통의 사람들처럼 저게 소문의 사생아구나, 과연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고 사람 구실 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게 소문만은 아니었다, 러빙 씨는 딸을 귀족 가문으로 시집보내고 싶어 하던데 그 저택을 통째로 팔아도 지참금을 감당하지 못하겠더라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러빙 씨부터 집사와 하녀장 풋맨과 마부들이 죄다 미쳐버린 거라는 생각에 동의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 장미 저택의 사람들은 단 한번도 잡담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일했고 주어진 일이 끝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제분기나 직방기가 된 것처럼 굴었다. 세탁실 하녀는 빨래 외에는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만 했다. 정원사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가지를 치다가 해가 지면 밥을 먹고 잠만 잤다. 러빙 씨로 말할 것 같으면, 스펀지가 된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서 술로 입술을 축이기만 했다. 침대에 눕지조차 않는 것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페넬로페 러빙은 러빙 씨의 딸이라는 자기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넬로피라고 불러."
"아, 하지만……."
"어쩌다 여기 왔어? 너 때문에 계획을 다 망칠 뻔 했거든."
"네? 저는 언니를 대신해서……."
"널 보니까 내 친구들이 생각나."
"아가씨의 친구들이요? 아가씨한테 친구가……."
"요즘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저, 저 때문인가요?"


생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대화는 처음이었다. 넬로피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젓고 손을 털었다. 죽은 새나 작은 동물의 시체를 묻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파낸 땅속에는 작은 상자가 있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걸 넣어서 숨겨 놨다고 생각하면 열여덟 살보다는 덟 살 같은 행동이었지만 나이답지는 못해도 사람답기는 한 행동이었으므로 나는 넬로피가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잖아, 사파이어 목걸이나 루비 반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뭔가 멋진 게 들어있길 바랐는데 고양이 그림의 사탕 상자에 들어 있는 건 그냥 쓰레기였다. 바스러진 꽃잎이나 새의 깃털, 애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빛 잃은 구슬 장식……. 넬로피는 그것을 내게 내밀어 보였다.


"마을로 돌아가서 저택에는 아무 일 없다고 해."
"네?"
"맹세를 넣어 두면 소원을 들어 주러 갈게."
"네?"
"거짓말은 하지 마."


"이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진절머리가 나."


넬로피는 작고 이상한 여자애였다. 그때까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예뻤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이상했다. 그 말은 자백처럼 들렸다. 사람들의 넋을 다 흩어 놓은 건 바로 나라고. 악마에게 이 사람들의 혼을 다 팔아 넘기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나는 원래 내 마음대로 되는 건 별로 없다고, 대부분 내 마음대로 되고 몇 가지 안 되는 게 있는 게 아니고 대부분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간혹 몇가지가 내 마음대로 되는 거라고 꼬집어 주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맹세를 하라니? 소원을 들어주겠다니.


"신에게 맹세코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말했을 때 넬로피는 고개를 들었다. 연둣빛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버텼다. 약속한 것은 공포가 아니라 연민이라고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넬로피는 아마 고민했던 것 같다. 그녀 계획을 '죄다 망칠 뻔한' 나에게 그건 과분한 기회였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고갤 끄덕일 순 없잖아. 만에 하나 이게 정말 넬로피의 짓이라면, 모두 제물이 된 거라면……. 넬로피가 나를 태엽인형으로 만드는 상상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을 때 상자가 닫혔다.

 

"난 이제 어른이 다 된 것 같아. 이렇게 많이 참을 수 있을 줄 몰랐는데."

 

나는 내 맹세가 그 상자 안에 갇히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넬로피는 나를 그냥 보내주었다.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사탕 상자를 들고 맨발로 흙을 밟으며 풀물이 진 잠옷 차림의 넬로피는 정원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마을로 돌아와서는 저택에 아무 일이 없고 일손이 모자라지 않아 돌아왔다고 전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전달된 말도 안 되는 액수의 급료를 나는 '소원' 대신 지불된 대가로 이해하고 받아들었다. 그것을 밑천 삼아 언니와 함께 집에서 도망쳤다. 일생에 있었던 많지 않은 행운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 시기에는 많은 중요한 것들이 모두 내 뜻대로 되어졌다.

 

이따금 우리 자매는 넬로피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언니는 사실 절반이 요정인 거라고 역설했지만 잘 봐줘야 마녀 어쩌면 악마 그 자체였을 것이다. 돌아가지는 않아도 수소문을 해볼 수는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언제가 되었든 찬장에 사탕 한 상자를 꼭 챙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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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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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에 비하면 지내기는 어때?"

 "최악! 공기는 나쁘고, 밤에도 시끄럽고, 맛있는 것도 없어!"

 "혹평이네. 앞의 두 개는 인정하지만 마지막은, 미스 러빙. 본인의 입맛이 너무 까다로우신 게 아닌지?"

 "과연. 들판의 양떼를 두고 썩은 시체나 들추어 대는 늑대가 할 법한 말이네!"

 "페넬로페."

 "이거 진짜 내 입맛 문제 아니야. 사준 건 고마운데 진짜 맛이, 클렌징 크림 먹은 거 같단 말이야."

 "……방부제 때문인가?"


 대화에는 격의가 없었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소란 사이에 끼어 맥주 한 병을 앞에 놓고 바에 자리를 잡은 헤바 파텔은 옆에 앉아 있는 핑크색 단발머리가 한때 뉴욕에서 가장 큰 뱀파이어 클랜의 일원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다. 왼쪽 팔꿈치부터 어깨까지, 쇠사슬과 뱀이 얽혀 있는 문신 때문이다. '방부제라니, 진짜 싫다.' 그 너머의 금발은 계속 투덜거리면서도 잔을 거의 비운 채였다. 위스키라도 들어 있어야 할 것 같은 잔 바닥에 한 모금 남아 있는 액체는 짙은 붉은색이다.


 "넬로피."

 "싫어, 꼬마 틸리. 하지마. 내가 싫어하는 거 알잖아. 일 번, 충고. 이 번, 조언. 삼 번……, 삼 번은 뭘로 하지?"

 "그래도 조금만 들어줘, 내 성의를 봐서. 여기는 런던과 달라. 난 아직도 뱀들의 머리가 잘리던 때가 생생하다고."


 그 말에 손가락을 꼽던 페넬로페 러빙은 가만히 꼬마 틸리를 바라보았다.


 꼬마라고 불려야 한다면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틸리보다는 그나마 열 일고여덟 살의 어린 여자애로 보이는 페넬로페 러빙 쪽이 어울릴 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페넬로페 러빙은 귀를 기울여도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큼 시끄럽고 단발머리의 네온사인 같은 머리카락 색이 굳이 특이하지도 않을 만큼 난잡스러운 조명과 빛깔들이 난무하는 다운월더 펍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인상이었다. 목이 깊게 파인 니트에 반짝이는 스팽글을 무슨 파라오처럼 걸고 있는데도 따지자면 어디 교외의, 무릎이 드러나지 않는 수녀 같은 디자인의 교복을 가진 기숙 여학교 같은 곳에나 있어야 할 것 같은, 싱그럽고 사랑스럽고 얼굴. 다만 헤바 파텔은 둘 중 어느 쪽도 그런 말에 어울릴 나이가, 사람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나마 한 쪽은 나이를 알기라도 하지. 


 다른 쪽은 정확한 나이조차 불명이다. 두 세기 전에 런던에서 처음 기록된 게 전부다. 헤바는 단발머리의 왼쪽 팔에서 혀를 날름거리는 뱀과 눈이 마주친다. 


 "무조건 굽히라는 게 아냐. 괜한 일을 만들지 말자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별로 맛있는 거, 먹지도 못했다니까."


 클레이브와의 전면전이라는 미친 짓을 벌였던 그 뱀파이어 클랜은 이제 이름까지 모두 지워진 상태였다. 클랜에 속해 있던 뱀파이어의 절반은 먼지로 돌아갔고, 살아남은 절반은 복종의 계약을 맺어야 했다. 그 계약의 증거는 문신에 있는 뱀의 머리를 자르는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단발머리는 당시에 도망칠 수 있었던 극히 소수의 뱀파이어 중 하나였다. 요행인지 실력인지 머리를 잃지 않은 뱀은 헤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송곳니를 드러내며 비늘을 세운다.


 "심지어 넌 혼자잖아."


 정체를 들켰을 리는 없는데. 글래머 룬을 쓴 헤바 파텔은 중립 선언을 한 뒤 스스로의 중립성을 중화기와 중화기 같은 마법으로 지키고 있는 이 다운월더 펍에 드나들 만한, 적당한 외양의 종족으로 보이고 있을 거였다. 헌터는 다운월드에서는 클레이브가 자비로울 때에도 공공의 적이다. 근래의 클레이브는 자비의 흉내도 내지 않고 있었고. 티나지 않게 시선을 돌리며 헤바는 이어질 대답에 귀를 기울인다. 그게 왜?


 "내가 왜 혼자인지도 알잖아, 틸리."


 그건 클레이브가 페넬로페 러빙에 대해 대대적인 척살령을 내리지 않는 마지노선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은 19세기 중엽 런던. 한 귀족 저택 하나를 몰살한 것이 이후 백 오십여년 간 이어질 기나긴 악덕의 목록에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누가 그녀를 뱀파이어로 만들었는지, 혹은 그녀 스스로 발생했는지, 그녀와 저택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누군가 기록을 남겼었을지도 모르지만 20세기에 있었던 두 차례 전쟁으로 당시 런던의 자료는 유실된 것이 많았다. 헤바 파텔이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기록에 등장할 때마다 일어나던 무차별적인 흡혈과 연쇄되는 살인의 이름,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페넬로페 러빙이 단 한번도, 적어도 알려진 바로는 단 한번도 '뱀파이어 자녀'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 정도다.


 "난 배고픈 것도 싫고, 맛없는 것도 싫어."


 구색맞추기 삼아 앞에 놓은 땅콩 접시를 뒤적이면서 페넬로페 러빙은 심드렁하게 중얼거린다. 그녀는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몇 번의 마주침이면 천방지축에 사고뭉치라는 귀여운 표현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이 뱀파이어가 간섭을 혐오하며 책임에 치를 떨고 인내를 원수처럼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굶주림을 참지 않고 인간을 마시지 않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며 합의되지 않은 흡혈, 어떤 의미에서는 도둑질이나 이따금은 살인에도 개의치 않는다. 클레이브가 런던에서 온 이 잔인무도한 뱀파이어를 방관하는 것은 그녀가 혼자이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강대한 뱀파이어라도 하나의 개체가 인간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헤바 파텔은 그것을 확인해야 했다.


 "클레이브가 널 뒤쫓을 거야. 죽고 싶어?"

 "아, 그거 말인데. 그렇지 않아도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


 물론 대대적인 척살령이 내려지지 않는다고 사람을 마셔 대는 뱀파이어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둘 수도 없는 일이라서, 헌터 하나를 골라 끈질긴 임무를 내린 클레이브 때문에 근래 헤바 파텔이 주력하고 있는 일은 페넬로페 러빙을 포획하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꼭 그런 이유로 이 펍에 왔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클레이브의 영향권 밖에 있는 중립 지역에 대한 주기적인 정찰 활동에 가까웠지. 하지만 헤바는 페넬로페를 발견했고, 페넬로페는 다른 뱀파이어와 함께 있었다. 그녀가 클랜을 만들기로 했는지, 아니면 뉴욕의 뱀파이어 클랜 중 하나에 속하기로 했는지, 요컨대 그녀의 방식을 집단화하기로 결정했는지 헤바는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단발머리 같은 도망자는 조용히 수십여년을 지나 보내 클레이브가 목을 원하는 명단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 있으니 합법적으로 정제된 혈액을 거부하고 사람을 습격하는 쪽이 당연히 우선될 문제다. 이 펍은 수많은 권리와 이해가 얽혀 있고 클레이브조차도 필요악으로 묵인하고 있는 중립지역인 만큼 여기서 페넬로페 러빙을 어떻게 하기보다는 뒤를 밟거나 지원을 요청해야겠지만…….


 "나, 요즘 요만-한 새끼 헌터 키워."


 헤바 파텔은 반쯤 넘어간 맥주를 도로 뱉어낸다. 


 "……무슨 미친 소리야?"

 "걔가 귀여워서 런던 안 가도 될 것 같아."

 "큽, 쿨럭, 컥!"

 "미쳤구나? 귀여울 게 없어서 헌터가 귀여워?"

 "알아? 까맣고 예쁜 여자앤데. 키는 이만한가? 귀여워."


 아까는 손가락 한 마디만 하다며? 그건 심정적인 사이즈. 아마 스무 살도 안 됐을 걸? 쿨럭, 큭, 커흑! 


 분명히 말해두자면 헤바 파텔과 페넬로페 러빙 사이의 공방은 분명히, 아주 진지하고 위험한 것들이었다. 헤바에게 내려진 명령이 아직 사살이 아니고 페넬로페도 아직 직접적으로 헌터를 살해할 생각은 없다고 해도, 아무리 헤바 파텔의 나이가 페넬로페 러빙이 살아 온 기간의 일 할을 조금 넘을 거라고 해도 키운다거나 귀엽다거나 하는 단어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바텐더에게서 냅킨을 받아 잘못 넘어가다 못해 반쯤 뱉어 버린 맥주를 닦은 헤바는 자신이 룬을 쓰고 모습을 바꾼 채라는 걸 되뇌이면서 최대한 민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자연스러운 기침 소리 때문에 뱀파이어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틸리. 나 자리 좀. 내가 했던 얘기, 흘려 듣지 마. 넬로피.


 "내 친구들은 다 너무 걱정이 많아. 걱정하는 것도 일인데."

 "……그런가요."

 "어차피 헌터가 쫓아다닌다면 귀여운 게 좋지 않아?"


 이렇게까지 주의를 끌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헤바와 그녀가 목줄을 채워 클레이브로 끌고 가야 하는 맹수 사이에 앉아 있던 단발머리는 자리를 떠나 버렸고 페넬로페 러빙은 이제 손을 뻗으면 헤바의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아무런 장애물 없이 앉아 있었다. 들켰을 리가 없는데, 대화를 엿들었다는 건 들켰지만 적어도 그 '요만한 새끼 헌터'가 바로 눈앞에 앉아있다는 건 들켰을 리 없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페넬로페 러빙은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이미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본 것처럼, 심지어는 그 '귀여운 애'를 유혹하기라도 하듯이 헤바와 그 연두색 눈을 마주치는 거였다. 나는 넬로피야.


 "너도 되게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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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칭

2019. 1. 29.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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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로피 해시

fixed star/싹 2019. 1. 26. 02:13


머리를 싹 밀어 버리고 싶기도 해 그러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또 짐승의 뱃속으로 걸어 들어가겠지 이제 내 삶의 자취는 다 도망쳐 온 발자국인데 당장 죽어 없어져야 하는 것들만 손끝에 닿도록 남겨 두었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나를 끌고 들어가기 전에 손가락이라도 잘라야 한다는 결론과 예지된 고통의 켜 사이에서 시간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다니

달려야 해 아주 멀리

멀리 먼 곳에 있는 깃발이나 산봉우리 같은 걸 보면서

달려야 따라잡히지 않을 테니까 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구르거나 넘어져도 잡히지 않으니까

우리 결코 도착하지 말자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바다에 닿아도 다시 증발하는 거야 날아가는 거야 휘발되는 거야 어디에도 갇히지 않도록 보호되지도 보관되지도 않도록 발이 닿았던 모든 자리에 도망친 흔적을 남겨도 내 삶은 미지로 흘러갈 테니



#


꿈이라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아니, 기억인가? 

'넬로피.'

넬로피는 끝나지 않는 어둠 속을 헤메고 있는 안젤라 그린을 아이 어르듯 끌어안았다. 숨은 가빴고 식은땀으로 등과 목덜미가 젖어 있었다. 깨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꿈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소리를 지르고 몸을 흔들어도 안젤라 그린은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다. 열꽃이 올라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밤. '넬로피…….'

그래서 넬로피는 그저 귀를 기울였다. 마녀가 된 뒤에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자가 이제는 잠이나 약에, 병에 취해서도 뇌까리지 않을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는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

 희고 깊은 도자기 욕조는 어딘가 화병을 닮은 것이다. 목이 좁아서 꽃을 세워 놓는 게 아니라, 줄기를 짧게 잘라서 아름답게 꽂아 장식하는 종류의 화병. 이름없는 마녀는 그 안에 앉아 있었다. 몸이 담겨 있는 물은 차디차고 놋쇠로 되어 있는 수도에는 열기가 스친 역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창문에는 성에가 끼어 있다. 죽은 몸을 씻길 때에도 이렇게는 하지 않을 것을.


 "장미?"


 수면에 파문이 이는 것은 물속으로부터의 움직임이 아니라 예고 없이 욕조 안으로 침입한 손가락 때문이다. 이름이 불리운 줄 알고 고개를 돌리면 욕조 가에 걸터앉아 물 속에 손을 넣은 것은 마찬가지로 금발의 마녀였다. 갑작스러운 난입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커녕 열리는 소리조차 없었는데. 그러나 눈이 마주치면 페넬로페 러빙은 고개를 살짝 기울일 뿐이다.


 "라벤더나 오렌지꽃은 어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한겨울에도 숄 한 번을 두르지 않던 주제에 코트까지 단추를 채워 입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지나간 시절처럼 마냥 웃고 있지 않아서기도 하겠지. 물은 느리고 확실하게 따듯해졌다. 차게 얼어붙었던 발끝이 간지럽혀지는 것처럼 저려 오기 시작한다. 괜한 일인 거 나도 알아. 널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야.


 "감기 걸려도 이제 옆에 있지 않을 거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손을 욕조 물 안에 넣은 페넬로페 러빙은 한동안 휘저으며 향이 좋은 꽃의 이름들을 주워섬겼다. 백합, 자스민, 일랑일랑……. 깊지만 크지는 않은 욕조에 이름 없는 마녀는 무릎을 조금 굽히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손끝이 만든 물결은 그녀의 다리를 휘감고 어루만진다. 창에 서려 있던 성에가 사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욕조의 물이 찻물처럼 따듯해지면 페넬로페는 손을 끄집어낸다. 


 "나는 싫지만, 장미가 좋겠다."


 그 말이 마지막으로, 더운 물에서 나온 손끝에 물방울이 맺히기도 전에, 페넬로페 러빙은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없다. 이름 없는 마녀가 잠겨 있는 수면 위로 수십 송이의 장미 꽃잎이 떨어질 뿐.

 





#


 달 없는 밤 들릴 리 없는 날개짓 소리.


 페넬로페 러빙조차도 적막을 깨트릴 수 없어서 발끝을 세운 밤이었다. 잠금쇠가 돌아가는 소리조차 조심하며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자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듯한 피 냄새가 났다.


 "사라!"


 눈이 달처럼 깊고 깃털이 흰 부엉이였다. 품에 넣으면 가볍게 안을 수 있지만, 발톱과 부리에 피를 묻힌 맹금이다. 비명처럼 감탄한 넬로피는 한달음에 새가 내려앉아 있는 난간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가면 토끼인지, 쥐인지 형체를 알아보기에는 찢겨 나간 소동물의 사체가 그 발밑에 걸려 있는 걸 알 수 있다. 넬로피는 눈을 부드럽게 휘고 웃으면서 새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가져다 닿게 한다. 땅에 사는 것들이 가질 수 없는 감촉.


 "올 줄 알았어."


 초콜릿 쿠키랑 크랜베리 쿠키를 유리병째로 준비해 두고 있었어. 꼭 네가 올 것 같은데 오지 않은 날에는 내가 하나씩 집어먹었는데 말이야,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사람의 머리만한 몸통에 사람의 팔만한 날개를 달고 있는 새의 몸은 소리없이 날고 사냥하고 포식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끌어안으면 구름처럼 뭉그러질 것만 같다. 넬로피는 팔에 힘을 주지 않고 그저 감아 안은 채 알 수 없는 살점을 뜯던 부리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춘다. 그리웠어. 보고 싶었어. 잘 지냈지? 달 없는 밤에도 길 잃지 않고서. 끊임없는 속삭임. 아,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다. 넬로피는 새의 날개깃에 얼굴을 부빈다. 


 "오늘 밤은 같이 있어. 새벽이 오기 전에 보내줄게."


 빛이 닿기 전에, 우리를 간지럽히는 태양이 뜨기 전에 말이야. 


 




#

모두 망쳐 놓은 다음에야 확신이 들었지

먹어 봐야 독인 줄 알았고

불탄 다음에야 열기를 느꼈다


#

밤마다 사연이 깊어서 허우적 거리기

우물을 팠으면 산 아래 마을 하나쯤이 잠길 일이었다


벌이라면 기꺼이 오세요 잘못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그러나 문득 치밀어오르는 이유와 핑계와 어쩔 수 없음과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몫이 아니었던 일들

긴긴 밤 뒤척이는 침대에 켜켜이 쌓여 온 비밀 기록된 적 없으니 역사가 되지 못하고 입에서 입으로 잃어버리고 말 노래가 되어

아주 멀리 아무것도 모르는 입으로부터 불리워질 흔적들이 기껏해야 연의 궤적이 된다는 사실은 차라리 안도였다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내가 죽이거나 없애거나 결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버려두거나 잃어버리지 않더라도 심지어는 손아귀에 새겨 두어도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은

입술을 앙다문 채 들썩이는 몸을 쥐고 신열을 견디듯 떠나가라고 했다 여기가 너의 머물 곳이 아니다 길을 잃은 순간들이 떠나왔던 자리를 결코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처럼



#

벗은 가슴을 앞에 두고 넬로피는 가만해졌다. 침대에 옷이고 마음이고 풀어헤쳐진 채 미스트 레인즈는 누워 있었다, 얼굴이 젖은 것 같기도 했다. 눈물이라기보다는 슬픔이나 괴로움이 그 눈망울이 큰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넬로피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서 미스트의 가슴 위에 귀를 조심히 얹는다. 심장은 빠르고 무섭게 하지만 아주 작고 가냘프게 뛰고 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넬로피는 그 몸을 가만히 끌어안고, 숨이 모자란 몸에게 쉬이 호흡을 불어넣듯이 어설픈 손으로 다독였다. 상처를 핥는 새끼 짐승들처럼. 아직 날개깃이 다 돋지 않은 어린 새들처럼.



#

"언제까지 쫓아올거야?"


목소리는 귓가에 입술을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가까웠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손을 뻗는다고 닿을 거리는 아니었지만, 페넬로페 러빙은 언젠가부터 노란 가로등에서 길게 늘어지는 헤바 파텔의 그림자 끝자락에 서 있기를 즐겼다.

텅 빈 골목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멀리에서 바람 소리인지 자동차의 배기음 같은 것, 술에 취한 사람들의 고성 같은 것들이 어렴풋이 들려 올 뿐이다. 구두 소리 한 번 없이 뱀파이어는 못으로 박아 놓은 듯했던 헤바 파텔의 그림자를 놓아주었다.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늑대의 귀가 아득하게, 귓가에 스치는 속삭임을 듣는다.


언제까지든 쫓아올거야?



#

아무것도 모르는 열두 살에 왕이 되어서 오 년간 휘둘리며 하라는 대로 한 것 밖에 게 없는데 열일곱에 기린이 병에 들면 제 나라 전체를 자기 무덤에 순장시킬 것처럼 모든 힘과 이름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그런 루트밖에는...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말할 필요 없어."


왕의 목소리는 아주 어리고 가느다랬다. 아무리 그 몸에 맞추어도 관과 의대가 거북하거나 거추장스러워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느날 그 모든 무겁고 화려한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홑옷 차림으로 조신 앞에 나타난 왕은 초칙 이후 단 한번도 없었던 칙령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쇄국.

유폐.

사형이나 선적의 박탈, 몰수, 파직. 


기린이 병들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된 지 꼭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왕은 무언가 아주 거대한, 그녀가 오 년 동안 단 한번도 시도해 본 적 없었던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이 분명했다. 금군은 그것이 개혁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척신들을 물리치고, 부패를 뿌리뽑으며, 나라를 바로 세우는…….


"들을 생각 없으니까."


무릎꿇려져 고두하면서 선왕을 섬겼던 노신 중 하나는 기이한 기시감에 몸을 떤다. 



#

완성이라니 낯선 말이라고 넬로피는 생각했다. 

 

"선샤인은 그런 말을 잘도 하네."


그 말은 비아냥거리거나 조소하는 게 아니라 순진한 의문이었다. 네게서 덜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여. 아르테미시아 모로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페넬로페는 고개를 들어서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문다.


너는 나 없이도 완성되어 있는 것만 같다고. 


"난 그런 거 싫어."


제 말을 반드시 들어 줄 거라고,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넬로피는 소리 높여 웃었다. 알았지, 선샤인? 나는 결코 너보다 먼저 죽지 않을 거야. 반드시 후회할 선언이었다.


"네가 내 품에서 완전히 죽는 걸 보여줘야 해."

 

 

#

첫사랑이었다. 


비어 있으며 이제는 조금의 온기도 남지 않은 침대를 보며 넬로피는 고개를 조금 기울인다. 러빙 부인이 교외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봄이 되고 나서, 짧은 여행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몸을 회복한 다음이었다. 넬로피는 코르넬리아 러빙이 박제되어 있던 침대의 기둥을 손끝으로 


잠시 만져 본다. 병마와 고통이 자리 틀고 있던 지독한 냄새 때문에 벽지며 커튼과 가구 카펫을 모두 바꾸는 중에 우습게도 그 침대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겹겹이 배인 시간과 역사는 말이 없다. 어렴풋이 남겨져 있는 것은, 넬로피는 마른 화병에 꽂혀 있는 장미 한 다발을 움켜쥐어 바스라트린다,


남겨져 있는 것은 한 줌,


시들어 가는 장미 향기…….




#추워한다면 


1

"날씨가 차네."

넬로피는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고개를 들었다. 어깨에 숄을 두른 코델리아 폰 슈바르츠가 곁에 서 있었다. 누군가 오는 것을 모를 정도로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추워?"

"잠이 안 와?"

제아무리 모두가 짐작했을 진실이라도, 나의 살인과 죄악이 너희 앞에 밝혀지는 게 두려워서 잠 못 이루고 있었다고 하는 건 지나치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넬로피는 웃으며 코델리아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 잡는다. 손이 차가워, 코델리아. 속삭이면서 넬로피는 고개를 숙여 찬 손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내일이면 잡을 수 없게 되는 손일지도 몰랐으므로, 소망을 담아서.



2

"추워!"

"와!"

뒤에서 달려든 미스트와 함께 그대로 나동그라진 넬로피가 눈 속에 처박혔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미스티 레이니! 자기도 같이 넘어진 주제에 넬로피가 넘어진 게 퍽 웃기다는 듯 깔깔 웃던 미스트에게서는 요란한 기침 소리가 이어진다.

구름이 끼어 햇빛이 옅었고 바람이 몹시 불어서 가만히만 있어도 체온이 뚝뚝 떨어지는 오후였다. 입술이 파랗게 질린 미스트가 덜덜 떨며 소리를 쳤다.

"진짜 추워!"

페넬로페 러빙 쪽으로 말하자면, 지나친 추위는 고통으로 분류되었다.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추위에 유독 약한 미스트 레인즈가 그걸 부러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자업자득!"

그렇게 말하면서도 넬로피는 눈에 뒹굴어 차가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차가운 것이 차가운 것에게라도 곁에 있으면 조금쯤은 따듯해질 것을 믿으면서.



3

악마를 발치에 늘어트린 안젤라 그린은 바람결에 나부끼며 서 있었다.

"페넬로페."

페넬로페 러빙은 그녀를 피할 수 없었다. 마주보고 버티어 서면 먼 곳을 향하던 시선은 천천히 떨어졌다. 아, 저 녹색 눈……. 같은 계통의 색깔일 텐데도 나는 한 번도 네 눈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지.

"안녕."

그래서 기이와 마녀, 이적과 염소를 목격했을 때처럼 페넬로페는 인사한다. 돌아오는 것은 짧은 냉소다. 안녕이라고?

"그래, 뭐라고 대답할까. '날이 이렇게 추운데 너무 얇게 입고 나온 것 같아, 넬로피.' 라고 할까?"

페넬로페는 언젠가처럼 조용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안젤라 그린은 그림자를  늘어트린 채 다시 시선을 들어 먼 곳을 향했다. 추위에 떨 줄 모르는 넬로피는 그녀가 더이상 춥지 않은지 궁금했지만 의문이 의심으로 돌아올 것을 알았으므로 묻지 않았다. 



4

"왜 이러고 있습니까."

레이첼 아마란스의 눈에 '이러지' 않고 있는 일이 더 드물기는 하겠으나, 넬로피는 방만하게 달랑거리고 있던 다리를 원피스 안으로 끌어들였다. 벤치 위에 웅크리고 올라앉는 자세다.

"저기 고양이 있어."

"예?"

확실히 품위 있다고는 하기 어려운 속도로 돌아보는 레이첼에게 넬로피는 저기, 저어기, 하면서 장미 덤불 아래를 가리킨다. 눈 때문에 희어서 안 보이지만. 아……, 저기 있군요. 어쩐지 안 보이더라니.

"춥지 않아?"

"고양이들은 털이 있으니까요. 너무 어리면 모를까."

"아니, 네가 말이야."

앞치마 아래 감싸 놓고 있던 손을 레이첼의 뺨에 대면 이미 한 차례 고양이들을 돌봐 주고 온 시스터 아마란스의 뺨은 차디찼다. 

"차가워."

"……손을 떼시면 되지 않습니까."

"차갑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넬로피는 그 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레이첼 아마란스가 떼어 내지 않는 이상은 떼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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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

fixed star/싹 2019. 1. 25. 15:54


 "페넬로페예요, 러빙 부인."

 코르넬리아 러빙은 턱을 살짝 들고 열두 살의 수양딸을 쳐다보았다. 다소 오만하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예의도 물정도 모르는 어린 계집아이 앞에서 대저택의 안주인이 해 보일 만한 것이기는 했다. 결혼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귀족 가문 출신의 여자가 사생아를 입적하게 되었을 때 보일 수 있는 반응으로는 냉정하도록 우아하다고 할 만 했고. 코르넬리아는 그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 페넬로페는 친모를 닮은 편이었다.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생김새는 싸늘한 인상의 코르넬리아와 마주보고 서 있으면 조금도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코르넬리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손을 모으고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나이 든 메이드에게 속삭였다. 수줍음이나 수치스러움이 아니라 절제된 경멸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저는 저 분을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메이드에게 이제부터 그녀가 머물 곳을 안내받으면서 페넬로페는 가까스로 그것을 물어보았다. 러빙 저택은 몰락한 귀족의 저택을 사들인 것으로, 제아무리 카펫과 융단을 깔아도 벽감과 계단에서 한기가 흘렀다. 초를 수십 개씩 켜 두어도 한구석에는 어둠이 고여 있었다. 메이드는 그녀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과 또 몇 가지의 일정, 계획, 러빙 가문의 딸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말해 주었지만 페넬로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정을 도탑게 쌓으며 살았던 집은 아니지만 열두 해를 살았던 친모의 집에서 페넬로페는 몸뚱어리와 입고 있는 옷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아마 이 옷가지도 벗는 순간 사라지게 되겠지. 메이드는 방의 문을 열어 주면서 준비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어머니라고 부르셔야겠지요." 

 페넬로페 러빙이 열두 살,  코르넬리아 러빙이 열 여덟 살 때의 일이다.




 T H A W




 겨울.

 추수감사절에도, 성탄에도 돌아오지 않았던 러빙 가문의 아가씨가 런던의 타운하우스에 돌아온 것은 해가 바뀌고 겨울이 한창일 때였다. 예고도 없었던 일이다. 정확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름에 있었던 모종의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쫓겨나듯 떠났던 미스 러빙은 그간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저택의 주인, 그러니까 러빙 씨의 뜻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므로 사용인들이 출처 모를 마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 당황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머니는 무탈하시지?"  

 그 사람이야 뭐, 무탈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러빙 아가씨는 분명 햇살처럼 밝고 사용인들에게 너그러운 성정이었으나 어떤 지점에서는 이상하게 사람이 낯설어지는 데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러빙 부인 같은. 러빙 부인과 러빙 아가씨는 친동기같이 지낼 만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그런 사이인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사이였다. 러빙 부인은 사생아에게 관대했고, 그러니까 매질하거나 굶기거나 그녀의 혀로도 모욕하지 않았으며 러빙 아가씨는 결코 그녀를 향해서는 말하지 않는 양어머니의 싸늘한 시선 앞에서 침묵을 지켰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최초의 이삼 년 정도였다. 러빙 부인이 과거 이 저택의 주인이 남작이었을 때 남작부인이 쓰던 방에 감금당한 지는 벌써 삼 년차에 접어들고 있었고, 사람을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자해를 해서 침대에 묶어 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감금이 먼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한 손에 꼽게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무탈하시냐'는 질문을 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페넬로페 러빙은 눈을 휘고 웃어 보였다.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던 사용인들에게 지어 보였던 얼굴과 꼭 같았다. 언젠가의 여름에 이 저택을 떠났을 때와도 꼭 같았고……. 

 배은망덕한 년. 풋맨 하나가 중얼거렸다.

 사생아들이 다 그렇지. 
 
 가문의 체면과 품위를 위해 그녀에게는 그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이따금씩 보내졌지만 감사의 말이나 편지 한 장이 전해지는 것 없었다. 그 많은 사치품들을 어떻게 한 건지 페넬로페 러빙은 교복으로 입는 차림새 그대로였고 가방 하나 없이 맨몸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였다. 손에 반쪽짜리 사과는 왜 들고 있는 건지. 딸에 대한 러빙 씨의 계획은 아직 유죄 판결이 내려지지는 않았으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 천한 신분의 범죄자들에게 그러하듯이 기숙 여학교에 처넣어 놓고 가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수준의 혼처를 구해 늦어도 졸업 전에는 결혼을 시키는 것이었다. 저 꼴을 보면 학교에서는 뭘 가르치는지 몸가짐이 열두 살 때와 달라진 게 없으니 퍽 요원한 계획이 되겠지만, 얼굴만큼은 이름이 드높았던 친모를 닮았으니 또 모르지. 친모를 닮은 게 얼굴만은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버지를 뵈어야겠어. 서재에 계셔?"

 그러나 이 시점에서 딸을 저택으로 불러들인 거라면 러빙 씨가 그녀의 잘못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러빙 부인은 저 꼴이고, 러빙 씨에게는 저 딸 하나 뿐이니까.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페넬로페 러빙의 귀환을 환대해야 하는지 어떻게든 숨겨서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야 하는지 집사도 하녀장도 바로 결정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경쾌한 걸음걸이를 막아 세우지 못하고 사용인들은 그녀의 뒤를 그저 따라가면서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 그야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주인 어른으로부터 달리 말씀은 없었지만 아가씨가 저렇게나 당당한 것을 보면 설마 독단으로 벌인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겠지만……. 하지만 페넬로페 러빙은 이전부터,

 이따금의 순간마다 섬뜩하게 낯설어질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택의 사용인들은 조금 허둥거렸다. 그러는 동안 미스 러빙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택 주인의 서재로 들어가 버렸고. 노크도, 인사도, 기다림도 없이! 어쩔 줄 모르는 어린 하녀들이나 떠들기 좋아하는 풋맨들을 세탁실이며 부엌으로 마굿간으로 쫓아 보내며 하녀장은 급히 차를 준비시켰다. 서재 옆 응접실에서 집사는 그 학교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주인님이 그녀를 급히 불러들이신 걸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페넬로페 러빙이 진짜 아가씨들처럼 귀한 아가씨는 아니어도 러빙 씨는 그런 부분에 심려가 깊었으니까. 왜 그런 중요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해 두지 않으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내의 소문을 종식시키고 위엄을 세우려는 목적이셨는지도 모른다. 페넬로페 러빙이 여자이므로 러빙 가문의 상속자가 될 일은 없지만, 결혼과 출산으로 가문을 이을 수는 있을 테니까.

 아, 코르넬리아 러빙이 남자아이를 하나만 낳아 주었더라면!

 그런 여자를 침대에 묶어 놓고 아이를 배게 하는 것은 가장 비열하고 치졸한 남자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서재에서는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차갑도록 우아한 예의를 알고 있으며 금욕과 처벌이 그 귀족적인 품위의 어머니이며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러빙 씨를 생각하면, 물론 그는 귀족이 아니며 러빙 가문에는 작위가 없지만, 그래서 더더욱 페넬로페 러빙이 안에 묻지도 않고 벌컥 서재에 침입해 들어갔을 때부터 고함이 터져 나와야 이상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의 목소리야 무겁고 거대한 문 너머로 들려올 리 없지만 차를 들려 들여보냈던 메이드의 말에 의하면 러빙 씨는 그저 앉아 있을 뿐이라는 거였다. 역시 주인 어른이 아가씨를 불러들이신 건가? 모르겠어요. 화가 나신 것 같진 않고?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조금 이상했어요. 어떻게? 손찌검을 하셨나? 아뇨, 아가씨께 손을 올리신 것 같진 않아요.

 아가씨는 웃고 계셨어요. 주인 어른은 아무 말씀 없으시고…….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아무 소란 없이,

 차 한 잔을 넉넉히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페넬로페 러빙은 마침내 서재에서 나왔다. 들어갈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의 입에서 '이제 어머니를 뵈어야겠어' 따위의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인들은 조금 안도했다. 페넬로페 러빙이 떠난 뒤로 코르넬리아 러빙이 눕혀져 있는 침대가 들어 있는 방의 문을 열 수 있는 건 식사 때 정도였다. 그것도 하루 세 번은 아니었고. 페넬로페 러빙은 여독이 쌓여 저녁 식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방으로 올라갔다. 뒤이어 서재에서 나온 주인 어른의 얼굴이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던 건 아마 서재에 두신 위스키라도 드셨기 때문이겠지. 



* * *



 넬로피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커튼은 빛에 닳아 낡아 있었다. 코르넬리아 러빙의 방에서는 구석마다 먼지 냄새 들러붙은 토사물의 냄새 음습한 적의와 오래 된 절망의 냄새가 났다. 넬로피는 손에 들고 있는 장미 다발을 잠깐 쳐다보았다. 장미의 냄새는 짙고 무겁고 요철이 많았다. 이 방에 이 장미를 두었다가는 그 요철에 가득가득 역한 냄새가 들러붙을 게 뻔했다. 사람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구역질이 나게 하는 향기가 될 것이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넬로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 한 방울 없이 먼지 쌓인 꽃병에 장미를 아무렇게나 꽂아 두었다. 근래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넬로피는 사뿐사뿐 걸어 침대 가에 앉았다. 코르넬리아 러빙은 잠들어 있었다. 아직 해가 저물지도 않은 시간이었으나 잠들지 않고 있는 게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넬로피는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창백한 얼굴은 바싹 말라 당장에라도 불이 붙을 것만 같은 낙엽처럼 바스락거렸고 새카만 색이었던 머리카락은 드문 드문 새어 회색처럼 보였다. 넬로피는 잠시 기다리기로 한다. 드문 결정이었지만 코르넬리아 러빙에게 별 일이 없었다면 아마 눈을 뜨는 순간부터, 페넬로페 러빙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할 거였다. 그녀가 방 안에 갇혔을 뿐 침대에 묶이지는 않았을 때에 그녀를 넘어트리고 입술을 뜯어 깨물었던 적이 있는 페넬로페 러빙은 코르넬리아의 평온이 깨어지는 순간을 잠시 기다릴 책임이 있다. 

 "아직 죽이지 않았어요."

 그 남자 말이야, 나의 아버지. 당신의 남편.

 넬로피는 이마와 뺨에 목덜미에 달라붙은 코르넬리아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떼어 넘기면서 속삭였다. 이런 성취는 바로 자랑하지 않고서는 참을 도리가 없다. 말하고 싶은 것이니까 잠들어 있는 귀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페넬로페는 제 입안의 혀도 뜻대로 할 수 없었던 러빙 씨에 대해 떠올렸다. 불쾌와 분노로 벌컥 쏟아지려는 목소리를 넬로피는 어렵지 않게 차단할 수 있었다. 끝없는 장미를 피워냈던, 결코 마르지 않던 물은 여전히 그녀 안에 있었다. 이어 그 앞에 내민 반쪽 사과를 먹은 것까지도 그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 붉디 붉은 사과는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구석이 있지.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여자의 탓으로 첫 인간은 원죄를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빙 씨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 말도 할 수 있었다, 말수가 극히 줄어들게 되겠지만 원래도 그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은 아니다. 손발을 휘두르지 않는 점이 좀 의아하게 여겨지기는 하겠지만. 무언가를 더하지 않고 참은 것은 넬로피의 생각에 그 남자의 몸과 또 영혼에 지분이 있다면 코르넬리아의 몫이 자신의 몫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그의 아내가 아닌가.
 
 신 앞에서 맹세한.

 넬로피는 인내했다. 코르넬리아 러빙의 인내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원래 가난한 자의 두 데나리온이 부자의 두 달란트만 한 법이다. 어머니의 몫으로 남겨 두었어요. 넬로피는 재잘거렸다. 그를 원하는 대로 해요. 이제 그녀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행할 줄 알았다. 심장을 뜯어내거나, 머리를 잘라내거나, 이 침대에 당신이 묶여 있었던 시간의 열 배 스무 배를 묶어 두는 것도 좋겠지요? 그리고나면 코르넬리아 러빙도 한 번쯤 그녀에게 말을 걸어 올 지 모르지. 귓가에서 입술을 떼어낸 넬로피는 그때에서야 코르넬리아가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무슨 짓을 했니?"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다. 

 넬로피는 코르넬리아를 침대에 묶은 끈을 다 흩어 두었지만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목에 음식물을 넣을 때에만 기도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으켜 앉혀지던 몸이었으므로 그녀가 스스로의 팔다리를 가누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는 희게까지 보이는 넬로피의 눈과 달리 코르넬리아는 짙은 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자라날수록 넬로피는 더더욱 아버지를 닮지 않게 되었는데, 도리어 코르넬리아가 그와 닮은 색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넬로피는 그 순간에 깨닫는다. 코르넬리아는 자기 목도 가누지 못해 누운 채 침대의 천개를 바라보면서 웅얼거렸다. 몇 년간 비명만 질러 온 목에서는 쇠창살 사이로 새는 겨울 바람처럼 탁하고 거친 소리밖에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네가 그럴 줄 알았어."

 비명이 아닌 목소리를 들어 본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넬로피는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탓을 하거나 비난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아주 지친 목소리였다. 그럴 수 있어. 넬로피는 이해하려고, 납득하려고 애쓴다. '모든 게 내 의도대로 되는 건 아니야.' 그녀가 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근래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 코르넬리아 러빙은 그녀의 수양딸에게서 피와 유황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진저리를 친다. 그 몸에 배어 있을 만한 냄새라고는 짙은 장미의 냄새 뿐인데도.

 "나는 알고 있었어."
 "어머니."
 "너 때문이라는 걸……."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복수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용서하거나, 잊어버린다거나.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 빼고요.

 그러나 코르넬리아는 어쩌면 지금에서야 진정으로 남편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출생하는 순간부터 그녀의 주인이었던 아버지의 손에서 그녀를 넘겨받은 남자, 신부와 신 앞에 서서 열 여덟 살 이후 그녀의 삶을 소유했던 남자가 그녀 안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픔 뿐이라는 것을 넬로피는 아득하게 감각했다, 아무런 원인도 없고 이유도 없는 아픔이었다. 언젠가부터 온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미 향기. 넬로피는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어머니.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어요."
 "나를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보내 주렴."
 "나와 같이 가요, 코르넬리아."
 "네게 자비가 있다면." 

 맑고 깊게 개어 있던 눈은 조금씩 흐려졌다. 페넬로페는 이제 다시 비명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붙잡을 수 있다면 온 몸과 온 힘으로 붙들어 놓고 싶었으나 그것이 그녀 남편이 그녀를 침대에 매어 놓은 것과 어떻게 다른지 순간 대답할 수 없어서 페넬로페는 그저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코르넬리아 러빙에게서 모든 시간이 사라지는 순간을, 끝나지 않을 고통만이 그 자리에 남는 것을. 당신을 아프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우습게도 그 고통의 얼굴이 페넬로페 러빙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면서…….

 아, 어머니. 나를 혼자 남겨 두지 마세요.



* * * 



 넬로피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쌓인 눈의 감각은 처음에는 모래와 나중에는 진흙의 것과 비슷했다.

 밤,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코르넬리아 러빙의 방에서 돌아와 창가에서 러빙 저택의 정원을 내려다보던 넬로피는 한 무리의 장미 덤불을 발견했다. 꽃도, 잎도 없이 가시와 줄기 뿐이지만 넬로피는 그게 장미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원래 이 자리에 장미가 있었던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코르넬리아 러빙이 감금되기 전에는 그녀가 원하는 꽃이 심겨졌을 것이나 그 이후로 이 정원은 러빙 가문의 저택에 필요한 취향과 유행에 따라 가꾸어지고 있었다. 넬로피는 숄 하나 걸치지 않은 나이티 차림으로 정원에 내려앉는다. 체온으로 발밑의 눈은 녹았다가도 다시 얼어붙었다. 넬로피는 장미를 하나 피워냈다. 검지 끝으로부터 붉은 꽃송이가 맺힌다.

 손아귀 안에 그 만개하지 않은 꽃망울을 쥔다.

 꺾이고 시드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스물 세 살의 코르넬리아 러빙에 대해서, 처음부터 자유로운 적 없던 영혼이나 비어 있는 상자를 채우는 일에 대해서. 넬로피는 꽃을 그 줄기로부터 잡아 뜯는다. 손 안에는 빛이 들지 않고 그림자가 져서 페넬로페 러빙은 마치 핏덩어리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눈으로 덮인 땅 위에서 한 마디마다 걸음 걸음 떼며 넬로피는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제아무리 날카롭게 깨어진 유리나 조각도 그 벗은 발에 상처입힐 수 없었다. 녹슨 못이 발등을 뚫고 나오더라도 페넬로페 러빙은 아프지 않았을 테지만……. 걸음마다 붉은 꽃잎이 떨어져 대신 흔적을 남겼다. 그 음률만큼은 장미 정원의 품에 있을 때에 찻잔 하나를 앞에 두고, 늦은 오후의 햇살이 드는 복도에서, 아무도 없는 계단참에서 홀로 불렀을 노래였다. 다만 이번에는, 어느 것도 지상의 언어는 아니다. 

 봄은 올 것이다.

 눈이 녹을 것이다.

 네 이야기도 끝난다.

 페넬로페는 웃었다. 그 웃음 소리는 어딘가 그녀 양어머니의 것과 무척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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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TH

fixed star/싹 2019. 1. 21. 14:28



아버지 없이 아이를 낳았을 때 여자와 여자의 어머니와 죽은 오라비의 아내 딸들은 이것이 그럭저럭 돈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B I R T H




“으악!”
꼴사나운 비명 다음에는 무언가 무너지고 엎어지고 와장창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폴리는 자기도 모르게 멈춰섰지만, 뒤를 돌아보는 게 좋을지 그냥 모른 척 가는 게 나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몇 번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어두운 곳에서도 햇빛이 드는 것처럼 보이는 금빛 속눈썹이었다. 골목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의 시선이 한동안 그 얼굴에 머무른다.

아.

“지난번에도 봤어, 그렇지?”

그래서 폴리는 뒤돌아보았다.

일곱 살 여자아이, 선명한 금발에 연둣빛 눈동자를 가진 일곱 살의 여자아이에게 이 골목은 해가 높건 졌건 발을 들일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좁고 구불구불하게 그래서 더 길고 끝없이 이어지는 사창가의 가장 끝에, 그래서 같은 길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의 주소를 쓰는 집에 폴리는 살고 있었으며 드물지 않게 여러 가지의 여러 개의 시선에 노출되었다. 지금도 뒤돌아섰으나 시선은 사라지지 않고 따라붙고 있었다. 폴리는 다급하지 않게 말을 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웠어.”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건 분명하지 않은 소속이었다. 이 거리 아이 같지 않게 부드럽고 혈색이 도는 흰 뺨, 대단할 것까지는 아니어도 결코 남루하다고도 평범하다고도 할 수 없는 옷차림, 끼니를 굶어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살결 같은 것. 폴리는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쥐어 꺼냈다.
요컨대 이것은 과시였다. 호되게 넘어진 것 같은 눈앞의 아이가 아니라 등 뒤에 서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거리 아이가 아니다. 자선을 베푸는 계급이다. 오늘은 사정이 있을 뿐이다. 나를 그런 식으로 쳐다본다면 불필요한 분란에 휘말릴 것이다……. 스스로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어도 의도는 명백했다. 폴리는 자기 손에 들린 것이 손수건이라는 걸 내밀고 나서야 알았다.

“묻었다.”

바구니에 들어 있던 건 자수를 맡긴 천들이었다. 가장 위에 곱게 접혀 있던 손수건은 깨끗하게 세탁이 되었음에도 은은한 향내가 배어 있었다. 폴리는 그 손수건으로 흙탕물이 튄 뺨을 닦아 주었다. 엄마의 손수건이었다. 없어져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심부름 다녀 오는 거야? 나도 그런데!”

눈이 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은 더럽고 미끄러웠다. 제나이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는 방금 자신이 어떻게 이용당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설령 똑같이 심부름이라는 단어를 쓰더라도 폴리가 한 일과 이 아이가 한 일이 같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거였다. 폴리의 바구니에서는 수를 놓은 비단 손수건 한 장이 사라져도 상관없지만 넘어져 버린 소녀는 단추 한 개의 갯수도 달라져서는 안 됐다. 폴리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구분하지는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감각한다. 결코 몰라야 했으므로 그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버지가 보냈다는 새 옷을 입히는 할머니가 원하던 모양으로 웃었을 뿐이었다.

“다친 데는 없어?”

일어나면 그 애는 앳된 얼굴에 비해 키가 컸다. 고개를 젓는 얼굴은 거리를 오가며 몇 번인가 지나쳤기 때문일까, 제대로 대화한 적도 없는데 익숙했다. 친구인지, 가족인지, 누군가 이 애를 부르는 이름을 들었던 것 같은데……. 더러워진 손수건을 신경쓰는 것 같아 폴리는 아예 그녀의 손에 손수건을 쥐어 주었다. 가져! 줄게. 그야말로 알량하고 비겁한 보상.
계절마다 폴리의 아버지인 적 없는 남자는 사치스러운 물건들을 그 길끝의 집으로 보냈다. 귀족이 될 지도 몰라. 지금도 재산은 으리으리하잖아. 결혼하면 애를 데려갈까? 그 부인 쪽에서 허락하겠어? 이미 결혼했는데 어쩌겠어!

……등 뒤의 시선은 그때에서야 무거운 구둣발 소리와 함께 멀어지기 시작했다. 손수건을 손에 든 여자아이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폴리는 그다지 미안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잘못된 일 없었다. 남자는 지나갔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넘어졌던 소녀는 일어났다. 폴리, 대답하려다 말고 폴리는 잠시 침묵한다.

입적하게 되면 기록이 깨끗한 편이 좋을 거라는 말에 폴리는 아직 성도 없었다. 여자애는 어차피 없는 애여도 있는 애여도 그만. 그래서 페넬로페라는 우스꽝스러울만큼 고전적인 이름과 폴리라는 그보다는 부를 만한 애칭이 그녀를 일컬었다. 상대가 어른이라면 페넬로페라고, 아이라면 폴리라고 소개했다. 별 것 아닌 질문에 대답이 없자 맞은편에서는 안절부절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폴리는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 보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두근거렸다. 이 애한테는 다른 이름을 알려주어도 좋지 않을까?

폴리의 것도 아닌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움켜쥐고, 그저 이름을 묻는 일에도 망설이며, 얼마든지 빼앗고 가로채고 헤집어놓을 수 있었던 언젠가의 첫 만남에서 그녀를 고이 놓아 보내 주었던 이 소녀에게…….

“……넬로피야.”

넬로피는 거울 속에 숨겨 두었던 이름을 꺼내 보았다. 이 입술에게는 불려져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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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러빙

fixed star/싹 2019. 1. 20. 02:33


 내 아름다운 어머니는 미쳤고 
내게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물려주었지
 
 
 
외형 :

  이 천사를 쥐어서 으스러트리면 손 안에 슈가 파우더가 묻어 나오지 않을까?

  꿀처럼 진한 금발은 굽슬거리며 허리까지 흘러내린다. 그러모으면 두 손에 양껏 들어차는 풍성한 머리카락은 빗질 한 번, 향유 한 방울 없이도 매끄럽기만 할 것처럼 보인다. 단정치 못하다는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왼쪽 귀 옆으로 느슨하게 묶어 늘어트린다. 막 돋아난 봄의 새싹 같은 연둣빛 눈동자에 반짝이는 속눈썹이 햇살처럼 드리운다. 마냥 열서너 살 소녀처럼 동그란 얼굴과 사랑스러운 장밋빛 뺨에는 언제나 미소가 머물러 있다. 싫은 소리나 미운 말이나 아픈 생각 같은 것은 한 티스푼도 섞이지 않은 미소. 
 
  눈처럼 희지만 따스하고 부드러운 살결, 사슴 같은 팔다리는 손끝에 조금만 힘을 주어 찔러도 뭉그러질 것만 같다. 무엇도 상해할 수 없고 어디에도 침범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몸이다. 그 손에 들릴 수 있는 날카로운 것이라고는 식사용 커트러리거나 수를 놓는 바늘 정도겠지. 가지런히 정리된 손톱은 아무리 세워도 피부에 긁힌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을 것이다. 끌어안으면 갓 구운 빵 같이 폭신하고 옷 아래는 결대로 찢은 속처럼 탄력적이다. 정원에서 화관을 만들 때는 소리 높여 웃기도 할 것 같고 밝은 빛 아래 있으면 그야말로 눈 부실 것 같지만, 해 아래에는 나가지 않는 편이다.

인장지원 신청여부 : O 
  
 
이름 : 페넬로페 러빙(Phenelope Loving), 넬로피Nellopie.
성별 : 여성
나이 : 17세 
키·몸무게 : 158, 동그스름한 체형. 
 
국적 : 영국 
계급 : 젠트리 계급   
  
 
성격 : 사랑스러운, 독선적인, 섬뜩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모두 부수어 버리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손을 잘라 내도 다리를 끊어 내도 하지 않는다. 사소하게는 식사 같은 매일의 일과나 과제에서부터 소등이나 취침, 외출에 이르는 거대한 규율까지도. 어떤 종류의 '교육적 지도'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어떤 말에도 감화되지 않고 어떤 조건에도 설득되지 않는다. 거액의 기부금이 아니었으면 교내 풍기를 흐린다는 이유로 제적되었어도 할 말이 없었을 무리 속의 검은 양. 교과 성적은 평가할 것조차 없는 수준.  
 
  다만 불순종할 때조차 행동거지는 우아하고 말씨는 예의바르다. 동기들에게 상냥하고 만나는 모든 소녀들에게 미소 지으며 넘어진 자에게 기꺼이 손을 주린 자에게는 그 날의 먹을 것을 나누지 않은 적 없다. 이렇듯 평소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로 싫은 일을 강요하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성정은 조용하며 눈에 띄지 않는다. 통제할 수 없는 말이 담장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은 것은 그런 이유. 선생에게는 건드려서 좋을 것 없는 학생으로, 학생 사이에서는 물정 모르는 어리광쟁이 정도로 여겨지는 듯 하다. 
 
  이따금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말이나 이해할 수 없는 문장 혹은 단어를 노래처럼 읊을 때가 있다. 눈을 휘어 웃으면서, 말을 건네는 것처럼.  
  
 
기타사항 :
 + 도슨 스쿨에는 열 여섯 살의 가을에 편입했다. 입학하기 전에는 집에서 교육받았다고 한다.
 + 젠트리 계급의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딸. 러빙 가문의 타운하우스에 들어왔을 때의 나이는 열 둘로 이전까지는 코르티잔이었던 친모의 외가에서 자랐다. '러빙 부인'인 양모 코르넬리아와는 여섯 살 차이. 아버지와 양모 사이에 아이는 없다.
 + 매 계절마다 저택에서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 펜과 잉크부터 슬리퍼와 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들을 보내 오지만 그 계절이 끝나기도 전에 잃어버리거나 누굴 줘 버리기 일쑤다.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 이전에 자기 물건이라는 감각 자체도 없는 것 같다.  손끝이 야무지지 못해서 뭘 흘리고 다니는 일이 잦고, 일상적으로 쓰는 물건들도 험하게 다뤄 망가트린다.
 + 먹는 것을 좋아한다. 단 것, 신 것, 쓰거나 짠 것을 가리지 않고 강한 맛을 낼수록 좋아하는 듯하다. 
 + 약한 햇빛 알러지가 있다. 
  
선관 : X
선관 동시 합격 여부 : X
 
 

이 아래로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특수 포지션 신청 여부 : O 
신청 탈락 시 관련 설정 수정 후 일반 캐릭터로 러닝하시겠습니까? : O  
 
관련 설정 :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양모 코르넬리아는 귀족 계급 출신. 결혼을 통해 귀족 계급에 편입되려 했던 시도가 실패한 뒤 아버지는 사생아인 페넬로페를 입적하고 집에 들인다. 부부의 결혼생활은 악화일로를 걸었으며, 페넬로페의 양육 또한 학대에 가까운 방치 수준이었다. 다만 열두 살의 페넬로페 러빙은 아름답고 싸늘한 러빙 부인, 여섯 살 위의 코르넬리아 러빙에게 연민과 경애의 정을 품게 되었을 뿐이고……. 열 여섯 살의 여름, 신경쇠약으로 방 안에 감금당한, 혹은 방 안에 감금당한 뒤 신경쇠약에 걸린 양모에게 건네던 비밀스러운 입맞춤을 들킨 뒤 아버지에 의해 도슨 스쿨에 강제로 편입하게 된다.  
 
  마녀가 된 것은 기숙학교 편입이 결정되고 방에 갇혀 가을학기의 시작을 기다리던 여름. 은밀한 관계였던 어린 하녀의 살갗에 스스로의 피로 애원하여 악마를 불러들였으며, 감각할 수 있는 모든 내외적 지각에 대해 통증으로 분류되는 것을 영원히 잘라내었다. 그 몸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이제 쾌락뿐이다. 더 많은, 가능하다면 모든, 고통받아 마땅하지 아니한 자매들에게 이 축복의 세례를 나누고 싶어 한다.
 
 
QUESTION
0. 학교생활은 즐거우신가요? 요즘 거울 속의 마녀에 대한 기묘한 소문이 돈다고 하지요. 
:  "거울 속은 분명 고결할 만큼 차디차고 깨끗하겠지요. 언젠가 그곳에 있는 날 향해 슬프고 괴로운 얼굴들이 답을 구해 올 거라고 생각하면 기쁘기 한량없어요."
1.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정의 천사 로서의.  
: "내게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어요. 때로는 더 위대하고 엄숙한 것을 위해 하잘것없는 일과들은 버려지는 법이죠."
2.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모두 함께 고통 없는 곳으로 가요."
3.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나요? 
: "찢어지는 비명 소리. 아, 어머니. 어머니는 내가 바이올린을 켤 때마다 노래하듯이 비명을 지르셨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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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xed star/싹 2018. 10. 29. 01:34


 새벽.


 소리나지 않게 문을 열고 돌아온 니콜라는 모자를 벗어 문 옆에 박아 둔 못에 걸었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느슨히 했던 머플러를 훌훌 푼다. 십이월 말의 아침해는 아직 지평선에 걸려 있었고 집 안의 공기는 싸늘했다. 코트까지는 벗지 않는다. 품에 든 이런저런 짐을 우선 식탁에 부려 놓은 니콜라는 걸음을 조심해 안쪽 방의 기척을 살폈다. 


 "……?"


 살짝 문을 밀어 엿본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벌써 일어났을 것 같진 않지만, 일어났다면 거실이든 욕실이든 다른 곳에 기척이 있어야 할 텐데 집안에는 고요한 적막과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붉은 아침햇빛 뿐이다. 침대 위의 이불은 가지런해서 누가 누웠던 흔적도 없어 보였고. 눈을 깜박이던 니콜라는 오래지않아 그 침대에 베개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야, 못다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느냐마는. 


 사실은 튀어오를 만큼 놀랐던 가슴을 내리누르며 니콜라는 옆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쪽이든 이 시간에 깨우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모양새다. 방문을 살짝 열자 얼굴에 온기가 훅 끼쳤다. 이동식 난로는 한참 전에 꺼졌을 텐데,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동시에 찬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바람에 니콜라는 방 안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예상한 바이기는 했지만 아니나다를까, 이 침대에는 베개가 두 개다. 


 "……어이구."


 자기도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아서, 니콜라는 제풀에 움찔거리며 입을 막았다. 한 이불에 베개는 두 개가, 손님방의 일인용 침대에 재주 좋게 구겨져 들어가 있었다. 니콜라가 청년이 되고 소년이 아니게 되고 어디에서든 홀로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어른이 되어 갔던 시간을 비껴 간 소년이 아직은 작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레인."


 니콜라는 침대 안쪽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두 아이가 같이 잠들어 있는 모습은 니콜라의 갈비뼈 안쪽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게 만들었지만 여하간에 침대는 일인용이고 엄밀히 말해서 한 쪽은 아이라고 하기엔 좀 크다. 그런 주제에 얼굴은 그대로 남아서, 지난 저녁 내내 십여 년 세월을 훌쩍 돌아가 버린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시달리긴 했지만. 니콜라는 다시 한 번 불렀다. 레인. 잠깐만 일어나자.


 "응, 니콜라……."


 정답다면 눈물나게 정다운데, 모로 누워서 품에 레인을 안은 살롬이 일어나면 꼼짝없이 근육통이라도 앓을 꼴이었다. 니콜라는 잠에 잠겨 있는 레인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안아들고, 살롬을 살살 돌려눕혔다. 흐트러진 이불을 목아래까지 끌어올려 덮어 놓고 웅얼거리며 품에 파고드는 레인에게는 코트를 벗어 덮는다. 


 "네 방에서 자야지."

 "살롬이랑, 이야기하다가……."

 "그래, 그래."


 그나마 레인의 방보다는 잠시 비웠던 제 방 쪽이 따듯할 거라 니콜라는 손님방 문을 닫고 나와 자기 방 침대에 레인을 눕혔다. 자리를 봐 준 다음 꺼트렸던 난로에 다시 불씨를 데운다. 레인은 조금 뒤척이다 조용해졌다. 평소에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지만, 오늘 같은 날 정도는 늦잠을 자도 괜찮겠지. 



*



 침대가 모두 빈 것은 결국 오전이 다 지나서였다. 바다를 건너 오는 동안 여독도 쌓였을 테고, 지난밤 레인과 한참은 소근댔을 테니 잠이 안 깰 만도 했다. 뒷머리가 독창적인 방향으로 뻗은 살롬이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걸어나오자 니콜라가 무미건조한 성탄절 인사를 건넨다. 일어났냐?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레인은요?"

 "아침에 눈이 왔거든."

 "하늘이 흐리긴 하던데."

 "우유 줄까?"


 무슨 동문서답인가 하고 눈을 깜박이던 살롬은 대답하기도 전에 내밀어진 머그컵을 받은 다음에야 그게 대답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지, 레인이 성탄절 아침 내리는 눈을 집 안에서 맞지는 않겠지. 요 앞에 있어. 눈사람 만든다는데 그렇게까지 쌓이진 않아서……. 니콜라의 말에 그럼 내다보면 보이려나, 하고 창가로 가는데 컵이 붙들린다. 


 "아. 꿀은 안 넣어도."

 "……왜?"


 왜냐고 하면 꼭 안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니콜라는 어떻게 데운 우유에 꿀을 넣지 말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표정이다. 허니디퍼로 감아 올린 꿀이 병 속으로 주륵주륵 떨어지고 있어서 살롬은 순순히 컵을 내밀었다. 그제서야 니콜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살롬의 컵 안에 꿀을 한바퀴 둘러 떨어트린다. 그런 주제에 자기 앞에 있는 것은 설탕 한 조각 안 들어간 것 같은 커피였다. 아마 레인에게도 꿀 넣은 우유를 줬겠지.  


 "선물은 받았냐."


 무슨 선물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니콜라는 늦은 아침식사인지 이른 점심식사인지 모를 그릇들을 식탁에 내려놓으면서 레인이 굳이 하지 않았을 이야기들을 주워섬겼다. 찌르거나 베는 칼은 아니더라도 칼은 칼이라, 자기 손가락을 끊어먹을 것만 같았는데 손재주가 제법 좋더라. 그림도 얼마나 잘 그리는지 조각가든 화가든 미술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데에는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잘 지낼게."


 대답을 바라고 늘어놓던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살롬은 컵을 들고 창가에 선 채 바깥을 보고 있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어서, 니콜라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부연했다. 레인은 잘 지낼 거야. 음, 잘 지내게 할 거니까.


 잘 키우겠다고 하기는 애매했다. 니콜라는 레인의 보호자였지만 니콜라는 아이를 키운다는 게 뭔지 잘 몰랐고, 니콜라와 레인이 살아가는 방식은 니콜라가 레인을 키우는 것과는 조금 다를 거였다. 물론 마음을 다할 거였지만, 하고 싶은 말을 잘 하는 것은 언제고 어려운 일이었어서 니콜라는 조금 더듬거린다. 


 "너도 잘 지내." 


 언제든 와. 레인도 널 보고 싶어하고…….


 때맞추어 계단을 바삐 오르는 소리가 들려서 니콜라는 살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문을 열었다. 시간을 비껴 가지 않았으므로 머리맡에 전나무 가지를 두었던 소년은 훌쩍 자라 청년이 다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니콜라는 아직도 우리들이 주먹만한 눈덩어리 두 개로 눈사람을 만들어 오는 열 살 같아서…….


 "니콜라! 살롬!"


 니콜라는 장갑 낀 손바닥 위에 자그마한 눈사람을 올려 온 소년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헝클어트렸다. 그래, 그래. 창틀 바깥에 내 놓으면 오래 갈 거야. 그러니 손 씻고 밥 먹자. 살롬, 너도. 


 몇 시간 뒤 저녁 즈음에는 다시 우편기가 떠야 했다. 밤을 날아서 니콜라는 성탄을 싣고 먼 곳으로 가고 돌아올 무렵이면 살롬은 다시 떠나갈 것이다. 이제 소년들은 없고 그들은 머지않아 흩어지고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지금 이 곳, 이 시간은.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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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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