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소리나지 않게 문을 열고 돌아온 니콜라는 모자를 벗어 문 옆에 박아 둔 못에 걸었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느슨히 했던 머플러를 훌훌 푼다. 십이월 말의 아침해는 아직 지평선에 걸려 있었고 집 안의 공기는 싸늘했다. 코트까지는 벗지 않는다. 품에 든 이런저런 짐을 우선 식탁에 부려 놓은 니콜라는 걸음을 조심해 안쪽 방의 기척을 살폈다.
"……?"
살짝 문을 밀어 엿본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벌써 일어났을 것 같진 않지만, 일어났다면 거실이든 욕실이든 다른 곳에 기척이 있어야 할 텐데 집안에는 고요한 적막과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붉은 아침햇빛 뿐이다. 침대 위의 이불은 가지런해서 누가 누웠던 흔적도 없어 보였고. 눈을 깜박이던 니콜라는 오래지않아 그 침대에 베개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야, 못다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느냐마는.
사실은 튀어오를 만큼 놀랐던 가슴을 내리누르며 니콜라는 옆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쪽이든 이 시간에 깨우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모양새다. 방문을 살짝 열자 얼굴에 온기가 훅 끼쳤다. 이동식 난로는 한참 전에 꺼졌을 텐데,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동시에 찬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바람에 니콜라는 방 안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예상한 바이기는 했지만 아니나다를까, 이 침대에는 베개가 두 개다.
"……어이구."
자기도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아서, 니콜라는 제풀에 움찔거리며 입을 막았다. 한 이불에 베개는 두 개가, 손님방의 일인용 침대에 재주 좋게 구겨져 들어가 있었다. 니콜라가 청년이 되고 소년이 아니게 되고 어디에서든 홀로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어른이 되어 갔던 시간을 비껴 간 소년이 아직은 작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레인."
니콜라는 침대 안쪽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두 아이가 같이 잠들어 있는 모습은 니콜라의 갈비뼈 안쪽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게 만들었지만 여하간에 침대는 일인용이고 엄밀히 말해서 한 쪽은 아이라고 하기엔 좀 크다. 그런 주제에 얼굴은 그대로 남아서, 지난 저녁 내내 십여 년 세월을 훌쩍 돌아가 버린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시달리긴 했지만. 니콜라는 다시 한 번 불렀다. 레인. 잠깐만 일어나자.
"응, 니콜라……."
정답다면 눈물나게 정다운데, 모로 누워서 품에 레인을 안은 살롬이 일어나면 꼼짝없이 근육통이라도 앓을 꼴이었다. 니콜라는 잠에 잠겨 있는 레인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안아들고, 살롬을 살살 돌려눕혔다. 흐트러진 이불을 목아래까지 끌어올려 덮어 놓고 웅얼거리며 품에 파고드는 레인에게는 코트를 벗어 덮는다.
"네 방에서 자야지."
"살롬이랑, 이야기하다가……."
"그래, 그래."
그나마 레인의 방보다는 잠시 비웠던 제 방 쪽이 따듯할 거라 니콜라는 손님방 문을 닫고 나와 자기 방 침대에 레인을 눕혔다. 자리를 봐 준 다음 꺼트렸던 난로에 다시 불씨를 데운다. 레인은 조금 뒤척이다 조용해졌다. 평소에는 일찍 일어나는 편이지만, 오늘 같은 날 정도는 늦잠을 자도 괜찮겠지.
*
침대가 모두 빈 것은 결국 오전이 다 지나서였다. 바다를 건너 오는 동안 여독도 쌓였을 테고, 지난밤 레인과 한참은 소근댔을 테니 잠이 안 깰 만도 했다. 뒷머리가 독창적인 방향으로 뻗은 살롬이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걸어나오자 니콜라가 무미건조한 성탄절 인사를 건넨다. 일어났냐?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레인은요?"
"아침에 눈이 왔거든."
"하늘이 흐리긴 하던데."
"우유 줄까?"
무슨 동문서답인가 하고 눈을 깜박이던 살롬은 대답하기도 전에 내밀어진 머그컵을 받은 다음에야 그게 대답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지, 레인이 성탄절 아침 내리는 눈을 집 안에서 맞지는 않겠지. 요 앞에 있어. 눈사람 만든다는데 그렇게까지 쌓이진 않아서……. 니콜라의 말에 그럼 내다보면 보이려나, 하고 창가로 가는데 컵이 붙들린다.
"아. 꿀은 안 넣어도."
"……왜?"
왜냐고 하면 꼭 안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니콜라는 어떻게 데운 우유에 꿀을 넣지 말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표정이다. 허니디퍼로 감아 올린 꿀이 병 속으로 주륵주륵 떨어지고 있어서 살롬은 순순히 컵을 내밀었다. 그제서야 니콜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살롬의 컵 안에 꿀을 한바퀴 둘러 떨어트린다. 그런 주제에 자기 앞에 있는 것은 설탕 한 조각 안 들어간 것 같은 커피였다. 아마 레인에게도 꿀 넣은 우유를 줬겠지.
"선물은 받았냐."
무슨 선물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니콜라는 늦은 아침식사인지 이른 점심식사인지 모를 그릇들을 식탁에 내려놓으면서 레인이 굳이 하지 않았을 이야기들을 주워섬겼다. 찌르거나 베는 칼은 아니더라도 칼은 칼이라, 자기 손가락을 끊어먹을 것만 같았는데 손재주가 제법 좋더라. 그림도 얼마나 잘 그리는지 조각가든 화가든 미술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데에는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잘 지낼게."
대답을 바라고 늘어놓던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살롬은 컵을 들고 창가에 선 채 바깥을 보고 있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어서, 니콜라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부연했다. 레인은 잘 지낼 거야. 음, 잘 지내게 할 거니까.
잘 키우겠다고 하기는 애매했다. 니콜라는 레인의 보호자였지만 니콜라는 아이를 키운다는 게 뭔지 잘 몰랐고, 니콜라와 레인이 살아가는 방식은 니콜라가 레인을 키우는 것과는 조금 다를 거였다. 물론 마음을 다할 거였지만, 하고 싶은 말을 잘 하는 것은 언제고 어려운 일이었어서 니콜라는 조금 더듬거린다.
"너도 잘 지내."
언제든 와. 레인도 널 보고 싶어하고…….
때맞추어 계단을 바삐 오르는 소리가 들려서 니콜라는 살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문을 열었다. 시간을 비껴 가지 않았으므로 머리맡에 전나무 가지를 두었던 소년은 훌쩍 자라 청년이 다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니콜라는 아직도 우리들이 주먹만한 눈덩어리 두 개로 눈사람을 만들어 오는 열 살 같아서…….
"니콜라! 살롬!"
니콜라는 장갑 낀 손바닥 위에 자그마한 눈사람을 올려 온 소년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헝클어트렸다. 그래, 그래. 창틀 바깥에 내 놓으면 오래 갈 거야. 그러니 손 씻고 밥 먹자. 살롬, 너도.
몇 시간 뒤 저녁 즈음에는 다시 우편기가 떠야 했다. 밤을 날아서 니콜라는 성탄을 싣고 먼 곳으로 가고 돌아올 무렵이면 살롬은 다시 떠나갈 것이다. 이제 소년들은 없고 그들은 머지않아 흩어지고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지금 이 곳, 이 시간은.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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