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로피 해시

fixed star/싹 2019. 1. 26. 02:13


머리를 싹 밀어 버리고 싶기도 해 그러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또 짐승의 뱃속으로 걸어 들어가겠지 이제 내 삶의 자취는 다 도망쳐 온 발자국인데 당장 죽어 없어져야 하는 것들만 손끝에 닿도록 남겨 두었다는 사실과 그것들이 나를 끌고 들어가기 전에 손가락이라도 잘라야 한다는 결론과 예지된 고통의 켜 사이에서 시간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다니

달려야 해 아주 멀리

멀리 먼 곳에 있는 깃발이나 산봉우리 같은 걸 보면서

달려야 따라잡히지 않을 테니까 달리고 있는 동안에는 구르거나 넘어져도 잡히지 않으니까

우리 결코 도착하지 말자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바다에 닿아도 다시 증발하는 거야 날아가는 거야 휘발되는 거야 어디에도 갇히지 않도록 보호되지도 보관되지도 않도록 발이 닿았던 모든 자리에 도망친 흔적을 남겨도 내 삶은 미지로 흘러갈 테니



#


꿈이라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아니, 기억인가? 

'넬로피.'

넬로피는 끝나지 않는 어둠 속을 헤메고 있는 안젤라 그린을 아이 어르듯 끌어안았다. 숨은 가빴고 식은땀으로 등과 목덜미가 젖어 있었다. 깨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꿈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소리를 지르고 몸을 흔들어도 안젤라 그린은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다. 열꽃이 올라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밤. '넬로피…….'

그래서 넬로피는 그저 귀를 기울였다. 마녀가 된 뒤에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자가 이제는 잠이나 약에, 병에 취해서도 뇌까리지 않을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는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

 희고 깊은 도자기 욕조는 어딘가 화병을 닮은 것이다. 목이 좁아서 꽃을 세워 놓는 게 아니라, 줄기를 짧게 잘라서 아름답게 꽂아 장식하는 종류의 화병. 이름없는 마녀는 그 안에 앉아 있었다. 몸이 담겨 있는 물은 차디차고 놋쇠로 되어 있는 수도에는 열기가 스친 역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창문에는 성에가 끼어 있다. 죽은 몸을 씻길 때에도 이렇게는 하지 않을 것을.


 "장미?"


 수면에 파문이 이는 것은 물속으로부터의 움직임이 아니라 예고 없이 욕조 안으로 침입한 손가락 때문이다. 이름이 불리운 줄 알고 고개를 돌리면 욕조 가에 걸터앉아 물 속에 손을 넣은 것은 마찬가지로 금발의 마녀였다. 갑작스러운 난입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커녕 열리는 소리조차 없었는데. 그러나 눈이 마주치면 페넬로페 러빙은 고개를 살짝 기울일 뿐이다.


 "라벤더나 오렌지꽃은 어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한겨울에도 숄 한 번을 두르지 않던 주제에 코트까지 단추를 채워 입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지나간 시절처럼 마냥 웃고 있지 않아서기도 하겠지. 물은 느리고 확실하게 따듯해졌다. 차게 얼어붙었던 발끝이 간지럽혀지는 것처럼 저려 오기 시작한다. 괜한 일인 거 나도 알아. 널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야.


 "감기 걸려도 이제 옆에 있지 않을 거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손을 욕조 물 안에 넣은 페넬로페 러빙은 한동안 휘저으며 향이 좋은 꽃의 이름들을 주워섬겼다. 백합, 자스민, 일랑일랑……. 깊지만 크지는 않은 욕조에 이름 없는 마녀는 무릎을 조금 굽히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손끝이 만든 물결은 그녀의 다리를 휘감고 어루만진다. 창에 서려 있던 성에가 사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욕조의 물이 찻물처럼 따듯해지면 페넬로페는 손을 끄집어낸다. 


 "나는 싫지만, 장미가 좋겠다."


 그 말이 마지막으로, 더운 물에서 나온 손끝에 물방울이 맺히기도 전에, 페넬로페 러빙은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없다. 이름 없는 마녀가 잠겨 있는 수면 위로 수십 송이의 장미 꽃잎이 떨어질 뿐.

 





#


 달 없는 밤 들릴 리 없는 날개짓 소리.


 페넬로페 러빙조차도 적막을 깨트릴 수 없어서 발끝을 세운 밤이었다. 잠금쇠가 돌아가는 소리조차 조심하며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자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듯한 피 냄새가 났다.


 "사라!"


 눈이 달처럼 깊고 깃털이 흰 부엉이였다. 품에 넣으면 가볍게 안을 수 있지만, 발톱과 부리에 피를 묻힌 맹금이다. 비명처럼 감탄한 넬로피는 한달음에 새가 내려앉아 있는 난간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가면 토끼인지, 쥐인지 형체를 알아보기에는 찢겨 나간 소동물의 사체가 그 발밑에 걸려 있는 걸 알 수 있다. 넬로피는 눈을 부드럽게 휘고 웃으면서 새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가져다 닿게 한다. 땅에 사는 것들이 가질 수 없는 감촉.


 "올 줄 알았어."


 초콜릿 쿠키랑 크랜베리 쿠키를 유리병째로 준비해 두고 있었어. 꼭 네가 올 것 같은데 오지 않은 날에는 내가 하나씩 집어먹었는데 말이야,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사람의 머리만한 몸통에 사람의 팔만한 날개를 달고 있는 새의 몸은 소리없이 날고 사냥하고 포식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끌어안으면 구름처럼 뭉그러질 것만 같다. 넬로피는 팔에 힘을 주지 않고 그저 감아 안은 채 알 수 없는 살점을 뜯던 부리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춘다. 그리웠어. 보고 싶었어. 잘 지냈지? 달 없는 밤에도 길 잃지 않고서. 끊임없는 속삭임. 아,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다. 넬로피는 새의 날개깃에 얼굴을 부빈다. 


 "오늘 밤은 같이 있어. 새벽이 오기 전에 보내줄게."


 빛이 닿기 전에, 우리를 간지럽히는 태양이 뜨기 전에 말이야. 


 




#

모두 망쳐 놓은 다음에야 확신이 들었지

먹어 봐야 독인 줄 알았고

불탄 다음에야 열기를 느꼈다


#

밤마다 사연이 깊어서 허우적 거리기

우물을 팠으면 산 아래 마을 하나쯤이 잠길 일이었다


벌이라면 기꺼이 오세요 잘못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그러나 문득 치밀어오르는 이유와 핑계와 어쩔 수 없음과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몫이 아니었던 일들

긴긴 밤 뒤척이는 침대에 켜켜이 쌓여 온 비밀 기록된 적 없으니 역사가 되지 못하고 입에서 입으로 잃어버리고 말 노래가 되어

아주 멀리 아무것도 모르는 입으로부터 불리워질 흔적들이 기껏해야 연의 궤적이 된다는 사실은 차라리 안도였다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내가 죽이거나 없애거나 결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버려두거나 잃어버리지 않더라도 심지어는 손아귀에 새겨 두어도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은

입술을 앙다문 채 들썩이는 몸을 쥐고 신열을 견디듯 떠나가라고 했다 여기가 너의 머물 곳이 아니다 길을 잃은 순간들이 떠나왔던 자리를 결코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처럼



#

벗은 가슴을 앞에 두고 넬로피는 가만해졌다. 침대에 옷이고 마음이고 풀어헤쳐진 채 미스트 레인즈는 누워 있었다, 얼굴이 젖은 것 같기도 했다. 눈물이라기보다는 슬픔이나 괴로움이 그 눈망울이 큰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넬로피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서 미스트의 가슴 위에 귀를 조심히 얹는다. 심장은 빠르고 무섭게 하지만 아주 작고 가냘프게 뛰고 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넬로피는 그 몸을 가만히 끌어안고, 숨이 모자란 몸에게 쉬이 호흡을 불어넣듯이 어설픈 손으로 다독였다. 상처를 핥는 새끼 짐승들처럼. 아직 날개깃이 다 돋지 않은 어린 새들처럼.



#

"언제까지 쫓아올거야?"


목소리는 귓가에 입술을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가까웠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손을 뻗는다고 닿을 거리는 아니었지만, 페넬로페 러빙은 언젠가부터 노란 가로등에서 길게 늘어지는 헤바 파텔의 그림자 끝자락에 서 있기를 즐겼다.

텅 빈 골목에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멀리에서 바람 소리인지 자동차의 배기음 같은 것, 술에 취한 사람들의 고성 같은 것들이 어렴풋이 들려 올 뿐이다. 구두 소리 한 번 없이 뱀파이어는 못으로 박아 놓은 듯했던 헤바 파텔의 그림자를 놓아주었다.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늑대의 귀가 아득하게, 귓가에 스치는 속삭임을 듣는다.


언제까지든 쫓아올거야?



#

아무것도 모르는 열두 살에 왕이 되어서 오 년간 휘둘리며 하라는 대로 한 것 밖에 게 없는데 열일곱에 기린이 병에 들면 제 나라 전체를 자기 무덤에 순장시킬 것처럼 모든 힘과 이름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그런 루트밖에는...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말할 필요 없어."


왕의 목소리는 아주 어리고 가느다랬다. 아무리 그 몸에 맞추어도 관과 의대가 거북하거나 거추장스러워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느날 그 모든 무겁고 화려한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홑옷 차림으로 조신 앞에 나타난 왕은 초칙 이후 단 한번도 없었던 칙령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쇄국.

유폐.

사형이나 선적의 박탈, 몰수, 파직. 


기린이 병들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된 지 꼭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왕은 무언가 아주 거대한, 그녀가 오 년 동안 단 한번도 시도해 본 적 없었던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이 분명했다. 금군은 그것이 개혁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척신들을 물리치고, 부패를 뿌리뽑으며, 나라를 바로 세우는…….


"들을 생각 없으니까."


무릎꿇려져 고두하면서 선왕을 섬겼던 노신 중 하나는 기이한 기시감에 몸을 떤다. 



#

완성이라니 낯선 말이라고 넬로피는 생각했다. 

 

"선샤인은 그런 말을 잘도 하네."


그 말은 비아냥거리거나 조소하는 게 아니라 순진한 의문이었다. 네게서 덜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여. 아르테미시아 모로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페넬로페는 고개를 들어서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문다.


너는 나 없이도 완성되어 있는 것만 같다고. 


"난 그런 거 싫어."


제 말을 반드시 들어 줄 거라고,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사람처럼 넬로피는 소리 높여 웃었다. 알았지, 선샤인? 나는 결코 너보다 먼저 죽지 않을 거야. 반드시 후회할 선언이었다.


"네가 내 품에서 완전히 죽는 걸 보여줘야 해."

 

 

#

첫사랑이었다. 


비어 있으며 이제는 조금의 온기도 남지 않은 침대를 보며 넬로피는 고개를 조금 기울인다. 러빙 부인이 교외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봄이 되고 나서, 짧은 여행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몸을 회복한 다음이었다. 넬로피는 코르넬리아 러빙이 박제되어 있던 침대의 기둥을 손끝으로 


잠시 만져 본다. 병마와 고통이 자리 틀고 있던 지독한 냄새 때문에 벽지며 커튼과 가구 카펫을 모두 바꾸는 중에 우습게도 그 침대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겹겹이 배인 시간과 역사는 말이 없다. 어렴풋이 남겨져 있는 것은, 넬로피는 마른 화병에 꽂혀 있는 장미 한 다발을 움켜쥐어 바스라트린다,


남겨져 있는 것은 한 줌,


시들어 가는 장미 향기…….




#추워한다면 


1

"날씨가 차네."

넬로피는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고개를 들었다. 어깨에 숄을 두른 코델리아 폰 슈바르츠가 곁에 서 있었다. 누군가 오는 것을 모를 정도로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추워?"

"잠이 안 와?"

제아무리 모두가 짐작했을 진실이라도, 나의 살인과 죄악이 너희 앞에 밝혀지는 게 두려워서 잠 못 이루고 있었다고 하는 건 지나치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넬로피는 웃으며 코델리아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 잡는다. 손이 차가워, 코델리아. 속삭이면서 넬로피는 고개를 숙여 찬 손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내일이면 잡을 수 없게 되는 손일지도 몰랐으므로, 소망을 담아서.



2

"추워!"

"와!"

뒤에서 달려든 미스트와 함께 그대로 나동그라진 넬로피가 눈 속에 처박혔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미스티 레이니! 자기도 같이 넘어진 주제에 넬로피가 넘어진 게 퍽 웃기다는 듯 깔깔 웃던 미스트에게서는 요란한 기침 소리가 이어진다.

구름이 끼어 햇빛이 옅었고 바람이 몹시 불어서 가만히만 있어도 체온이 뚝뚝 떨어지는 오후였다. 입술이 파랗게 질린 미스트가 덜덜 떨며 소리를 쳤다.

"진짜 추워!"

페넬로페 러빙 쪽으로 말하자면, 지나친 추위는 고통으로 분류되었다.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추위에 유독 약한 미스트 레인즈가 그걸 부러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자업자득!"

그렇게 말하면서도 넬로피는 눈에 뒹굴어 차가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차가운 것이 차가운 것에게라도 곁에 있으면 조금쯤은 따듯해질 것을 믿으면서.



3

악마를 발치에 늘어트린 안젤라 그린은 바람결에 나부끼며 서 있었다.

"페넬로페."

페넬로페 러빙은 그녀를 피할 수 없었다. 마주보고 버티어 서면 먼 곳을 향하던 시선은 천천히 떨어졌다. 아, 저 녹색 눈……. 같은 계통의 색깔일 텐데도 나는 한 번도 네 눈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지.

"안녕."

그래서 기이와 마녀, 이적과 염소를 목격했을 때처럼 페넬로페는 인사한다. 돌아오는 것은 짧은 냉소다. 안녕이라고?

"그래, 뭐라고 대답할까. '날이 이렇게 추운데 너무 얇게 입고 나온 것 같아, 넬로피.' 라고 할까?"

페넬로페는 언젠가처럼 조용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면 안젤라 그린은 그림자를  늘어트린 채 다시 시선을 들어 먼 곳을 향했다. 추위에 떨 줄 모르는 넬로피는 그녀가 더이상 춥지 않은지 궁금했지만 의문이 의심으로 돌아올 것을 알았으므로 묻지 않았다. 



4

"왜 이러고 있습니까."

레이첼 아마란스의 눈에 '이러지' 않고 있는 일이 더 드물기는 하겠으나, 넬로피는 방만하게 달랑거리고 있던 다리를 원피스 안으로 끌어들였다. 벤치 위에 웅크리고 올라앉는 자세다.

"저기 고양이 있어."

"예?"

확실히 품위 있다고는 하기 어려운 속도로 돌아보는 레이첼에게 넬로피는 저기, 저어기, 하면서 장미 덤불 아래를 가리킨다. 눈 때문에 희어서 안 보이지만. 아……, 저기 있군요. 어쩐지 안 보이더라니.

"춥지 않아?"

"고양이들은 털이 있으니까요. 너무 어리면 모를까."

"아니, 네가 말이야."

앞치마 아래 감싸 놓고 있던 손을 레이첼의 뺨에 대면 이미 한 차례 고양이들을 돌봐 주고 온 시스터 아마란스의 뺨은 차디찼다. 

"차가워."

"……손을 떼시면 되지 않습니까."

"차갑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넬로피는 그 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레이첼 아마란스가 떼어 내지 않는 이상은 떼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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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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