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실 나는 이 아가씨에 대해 아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고, 보이는 것처럼 얼굴이 아름답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치장해 놓았으나 결국 밖에서 보낸 태생의 탓일까?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러빙 씨의 실패작이라고…….
쉬쉬하였으나 저택을 발칵 뒤집어 놓고 쫓겨나듯이 기숙학교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계모인 러빙 부인에게 해꼬지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결국 남작부인의 방에서 그녀를 내쫓아 버린 것을 보면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저택의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페넬로페 러빙을 무시하거나 모른척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장밋빛 뺨의 소녀는 예뻤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나를 고용한 것이 되는 러빙 씨의 딸이기도 했다. 없는 사람처럼 지나가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저택에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페넬로페 러빙 하나밖에 없었다. 날은 화창하고 하늘은 푸르고 정원의 장미 향기는 짙어지는데 내가 이곳에 와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은 표정이 없었고 몸짓이 부자연스러웠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택은 침묵과 권태에 잠겨 있었다. 그게 귀족적인 저택의 미덕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숨이 막혔다. 태엽인형 사이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페넬로페 러빙이 제대로 된 의복도 갖추지 않고 맨발에 잠옷 차림으로 정원에서 장미 덤불의 뿌리를 파헤치고 있을 때 보통의 사람들처럼 저게 소문의 사생아구나, 과연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고 사람 구실 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게 소문만은 아니었다, 러빙 씨는 딸을 귀족 가문으로 시집보내고 싶어 하던데 그 저택을 통째로 팔아도 지참금을 감당하지 못하겠더라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러빙 씨부터 집사와 하녀장 풋맨과 마부들이 죄다 미쳐버린 거라는 생각에 동의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 장미 저택의 사람들은 단 한번도 잡담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일했고 주어진 일이 끝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제분기나 직방기가 된 것처럼 굴었다. 세탁실 하녀는 빨래 외에는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만 했다. 정원사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가지를 치다가 해가 지면 밥을 먹고 잠만 잤다. 러빙 씨로 말할 것 같으면, 스펀지가 된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서 술로 입술을 축이기만 했다. 침대에 눕지조차 않는 것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페넬로페 러빙은 러빙 씨의 딸이라는 자기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넬로피라고 불러."
"아, 하지만……."
"어쩌다 여기 왔어? 너 때문에 계획을 다 망칠 뻔 했거든."
"네? 저는 언니를 대신해서……."
"널 보니까 내 친구들이 생각나."
"아가씨의 친구들이요? 아가씨한테 친구가……."
"요즘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저, 저 때문인가요?"
생애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대화는 처음이었다. 넬로피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젓고 손을 털었다. 죽은 새나 작은 동물의 시체를 묻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파낸 땅속에는 작은 상자가 있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걸 넣어서 숨겨 놨다고 생각하면 열여덟 살보다는 덟 살 같은 행동이었지만 나이답지는 못해도 사람답기는 한 행동이었으므로 나는 넬로피가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잖아, 사파이어 목걸이나 루비 반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뭔가 멋진 게 들어있길 바랐는데 고양이 그림의 사탕 상자에 들어 있는 건 그냥 쓰레기였다. 바스러진 꽃잎이나 새의 깃털, 애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빛 잃은 구슬 장식……. 넬로피는 그것을 내게 내밀어 보였다.
"마을로 돌아가서 저택에는 아무 일 없다고 해."
"네?"
"맹세를 넣어 두면 소원을 들어 주러 갈게."
"네?"
"거짓말은 하지 마."
"이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진절머리가 나."
넬로피는 작고 이상한 여자애였다. 그때까지,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예뻤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이상했다. 그 말은 자백처럼 들렸다. 사람들의 넋을 다 흩어 놓은 건 바로 나라고. 악마에게 이 사람들의 혼을 다 팔아 넘기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나는 원래 내 마음대로 되는 건 별로 없다고, 대부분 내 마음대로 되고 몇 가지 안 되는 게 있는 게 아니고 대부분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간혹 몇가지가 내 마음대로 되는 거라고 꼬집어 주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맹세를 하라니? 소원을 들어주겠다니.
"신에게 맹세코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말했을 때 넬로피는 고개를 들었다. 연둣빛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버텼다. 약속한 것은 공포가 아니라 연민이라고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넬로피는 아마 고민했던 것 같다. 그녀 계획을 '죄다 망칠 뻔한' 나에게 그건 과분한 기회였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고갤 끄덕일 순 없잖아. 만에 하나 이게 정말 넬로피의 짓이라면, 모두 제물이 된 거라면……. 넬로피가 나를 태엽인형으로 만드는 상상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을 때 상자가 닫혔다.
"난 이제 어른이 다 된 것 같아. 이렇게 많이 참을 수 있을 줄 몰랐는데."
나는 내 맹세가 그 상자 안에 갇히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넬로피는 나를 그냥 보내주었다.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사탕 상자를 들고 맨발로 흙을 밟으며 풀물이 진 잠옷 차림의 넬로피는 정원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마을로 돌아와서는 저택에 아무 일이 없고 일손이 모자라지 않아 돌아왔다고 전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전달된 말도 안 되는 액수의 급료를 나는 '소원' 대신 지불된 대가로 이해하고 받아들었다. 그것을 밑천 삼아 언니와 함께 집에서 도망쳤다. 일생에 있었던 많지 않은 행운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 시기에는 많은 중요한 것들이 모두 내 뜻대로 되어졌다.
이따금 우리 자매는 넬로피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언니는 사실 절반이 요정인 거라고 역설했지만 잘 봐줘야 마녀 어쩌면 악마 그 자체였을 것이다. 돌아가지는 않아도 수소문을 해볼 수는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언제가 되었든 찬장에 사탕 한 상자를 꼭 챙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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