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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
새/
2019. 1. 25. 15:54
"페넬로페예요, 러빙 부인."
코르넬리아 러빙은 턱을 살짝 들고 열두 살의 수양딸을 쳐다보았다. 다소 오만하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예의도 물정도 모르는 어린 계집아이 앞에서 대저택의 안주인이 해 보일 만한 것이기는 했다. 결혼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귀족 가문 출신의 여자가 사생아를 입적하게 되었을 때 보일 수 있는 반응으로는 냉정하도록 우아하다고 할 만 했고. 코르넬리아는 그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 페넬로페는 친모를 닮은 편이었다.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생김새는 싸늘한 인상의 코르넬리아와 마주보고 서 있으면 조금도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코르넬리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손을 모으고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나이 든 메이드에게 속삭였다. 수줍음이나 수치스러움이 아니라 절제된 경멸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저는 저 분을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메이드에게 이제부터 그녀가 머물 곳을 안내받으면서 페넬로페는 가까스로 그것을 물어보았다. 러빙 저택은 몰락한 귀족의 저택을 사들인 것으로, 제아무리 카펫과 융단을 깔아도 벽감과 계단에서 한기가 흘렀다. 초를 수십 개씩 켜 두어도 한구석에는 어둠이 고여 있었다. 메이드는 그녀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과 또 몇 가지의 일정, 계획, 러빙 가문의 딸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말해 주었지만 페넬로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정을 도탑게 쌓으며 살았던 집은 아니지만 열두 해를 살았던 친모의 집에서 페넬로페는 몸뚱어리와 입고 있는 옷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아마 이 옷가지도 벗는 순간 사라지게 되겠지. 메이드는 방의 문을 열어 주면서 준비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어머니라고 부르셔야겠지요."
페넬로페 러빙이 열두 살, 코르넬리아 러빙이 열 여덟 살 때의 일이다.
T H A W
겨울.
추수감사절에도, 성탄에도 돌아오지 않았던 러빙 가문의 아가씨가 런던의 타운하우스에 돌아온 것은 해가 바뀌고 겨울이 한창일 때였다. 예고도 없었던 일이다. 정확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름에 있었던 모종의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쫓겨나듯 떠났던 미스 러빙은 그간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저택의 주인, 그러니까 러빙 씨의 뜻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므로 사용인들이 출처 모를 마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 당황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머니는 무탈하시지?"
그 사람이야 뭐, 무탈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러빙 아가씨는 분명 햇살처럼 밝고 사용인들에게 너그러운 성정이었으나 어떤 지점에서는 이상하게 사람이 낯설어지는 데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러빙 부인 같은. 러빙 부인과 러빙 아가씨는 친동기같이 지낼 만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그런 사이인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사이였다. 러빙 부인은 사생아에게 관대했고, 그러니까 매질하거나 굶기거나 그녀의 혀로도 모욕하지 않았으며 러빙 아가씨는 결코 그녀를 향해서는 말하지 않는 양어머니의 싸늘한 시선 앞에서 침묵을 지켰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최초의 이삼 년 정도였다. 러빙 부인이 과거 이 저택의 주인이 남작이었을 때 남작부인이 쓰던 방에 감금당한 지는 벌써 삼 년차에 접어들고 있었고, 사람을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자해를 해서 침대에 묶어 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감금이 먼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한 손에 꼽게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무탈하시냐'는 질문을 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페넬로페 러빙은 눈을 휘고 웃어 보였다. 마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던 사용인들에게 지어 보였던 얼굴과 꼭 같았다. 언젠가의 여름에 이 저택을 떠났을 때와도 꼭 같았고…….
배은망덕한 년. 풋맨 하나가 중얼거렸다.
사생아들이 다 그렇지.
가문의 체면과 품위를 위해 그녀에게는 그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이따금씩 보내졌지만 감사의 말이나 편지 한 장이 전해지는 것 없었다. 그 많은 사치품들을 어떻게 한 건지 페넬로페 러빙은 교복으로 입는 차림새 그대로였고 가방 하나 없이 맨몸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였다. 손에 반쪽짜리 사과는 왜 들고 있는 건지. 딸에 대한 러빙 씨의 계획은 아직 유죄 판결이 내려지지는 않았으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 천한 신분의 범죄자들에게 그러하듯이 기숙 여학교에 처넣어 놓고 가문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수준의 혼처를 구해 늦어도 졸업 전에는 결혼을 시키는 것이었다. 저 꼴을 보면 학교에서는 뭘 가르치는지 몸가짐이 열두 살 때와 달라진 게 없으니 퍽 요원한 계획이 되겠지만, 얼굴만큼은 이름이 드높았던 친모를 닮았으니 또 모르지. 친모를 닮은 게 얼굴만은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버지를 뵈어야겠어. 서재에 계셔?"
그러나 이 시점에서 딸을 저택으로 불러들인 거라면 러빙 씨가 그녀의 잘못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러빙 부인은 저 꼴이고, 러빙 씨에게는 저 딸 하나 뿐이니까.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페넬로페 러빙의 귀환을 환대해야 하는지 어떻게든 숨겨서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야 하는지 집사도 하녀장도 바로 결정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경쾌한 걸음걸이를 막아 세우지 못하고 사용인들은 그녀의 뒤를 그저 따라가면서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지나치게 갑작스러웠다. 그야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주인 어른으로부터 달리 말씀은 없었지만 아가씨가 저렇게나 당당한 것을 보면 설마 독단으로 벌인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겠지만……. 하지만 페넬로페 러빙은 이전부터,
이따금의 순간마다 섬뜩하게 낯설어질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택의 사용인들은 조금 허둥거렸다. 그러는 동안 미스 러빙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택 주인의 서재로 들어가 버렸고. 노크도, 인사도, 기다림도 없이! 어쩔 줄 모르는 어린 하녀들이나 떠들기 좋아하는 풋맨들을 세탁실이며 부엌으로 마굿간으로 쫓아 보내며 하녀장은 급히 차를 준비시켰다. 서재 옆 응접실에서 집사는 그 학교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주인님이 그녀를 급히 불러들이신 걸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페넬로페 러빙이 진짜 아가씨들처럼 귀한 아가씨는 아니어도 러빙 씨는 그런 부분에 심려가 깊었으니까. 왜 그런 중요한 일을 아무에게도 말해 두지 않으셨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내의 소문을 종식시키고 위엄을 세우려는 목적이셨는지도 모른다. 페넬로페 러빙이 여자이므로 러빙 가문의 상속자가 될 일은 없지만, 결혼과 출산으로 가문을 이을 수는 있을 테니까.
아, 코르넬리아 러빙이 남자아이를 하나만 낳아 주었더라면!
그런 여자를 침대에 묶어 놓고 아이를 배게 하는 것은 가장 비열하고 치졸한 남자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서재에서는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차갑도록 우아한 예의를 알고 있으며 금욕과 처벌이 그 귀족적인 품위의 어머니이며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러빙 씨를 생각하면, 물론 그는 귀족이 아니며 러빙 가문에는 작위가 없지만, 그래서 더더욱 페넬로페 러빙이 안에 묻지도 않고 벌컥 서재에 침입해 들어갔을 때부터 고함이 터져 나와야 이상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의 목소리야 무겁고 거대한 문 너머로 들려올 리 없지만 차를 들려 들여보냈던 메이드의 말에 의하면 러빙 씨는 그저 앉아 있을 뿐이라는 거였다. 역시 주인 어른이 아가씨를 불러들이신 건가? 모르겠어요. 화가 나신 것 같진 않고?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조금 이상했어요. 어떻게? 손찌검을 하셨나? 아뇨, 아가씨께 손을 올리신 것 같진 않아요.
아가씨는 웃고 계셨어요. 주인 어른은 아무 말씀 없으시고…….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아무 소란 없이,
차 한 잔을 넉넉히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페넬로페 러빙은 마침내 서재에서 나왔다. 들어갈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의 입에서 '이제 어머니를 뵈어야겠어' 따위의 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인들은 조금 안도했다. 페넬로페 러빙이 떠난 뒤로 코르넬리아 러빙이 눕혀져 있는 침대가 들어 있는 방의 문을 열 수 있는 건 식사 때 정도였다. 그것도 하루 세 번은 아니었고. 페넬로페 러빙은 여독이 쌓여 저녁 식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방으로 올라갔다. 뒤이어 서재에서 나온 주인 어른의 얼굴이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던 건 아마 서재에 두신 위스키라도 드셨기 때문이겠지.
* * *
넬로피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커튼은 빛에 닳아 낡아 있었다. 코르넬리아 러빙의 방에서는 구석마다 먼지 냄새 들러붙은 토사물의 냄새 음습한 적의와 오래 된 절망의 냄새가 났다. 넬로피는 손에 들고 있는 장미 다발을 잠깐 쳐다보았다. 장미의 냄새는 짙고 무겁고 요철이 많았다. 이 방에 이 장미를 두었다가는 그 요철에 가득가득 역한 냄새가 들러붙을 게 뻔했다. 사람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구역질이 나게 하는 향기가 될 것이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넬로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 한 방울 없이 먼지 쌓인 꽃병에 장미를 아무렇게나 꽂아 두었다. 근래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넬로피는 사뿐사뿐 걸어 침대 가에 앉았다. 코르넬리아 러빙은 잠들어 있었다. 아직 해가 저물지도 않은 시간이었으나 잠들지 않고 있는 게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넬로피는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창백한 얼굴은 바싹 말라 당장에라도 불이 붙을 것만 같은 낙엽처럼 바스락거렸고 새카만 색이었던 머리카락은 드문 드문 새어 회색처럼 보였다. 넬로피는 잠시 기다리기로 한다. 드문 결정이었지만 코르넬리아 러빙에게 별 일이 없었다면 아마 눈을 뜨는 순간부터, 페넬로페 러빙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할 거였다. 그녀가 방 안에 갇혔을 뿐 침대에 묶이지는 않았을 때에 그녀를 넘어트리고 입술을 뜯어 깨물었던 적이 있는 페넬로페 러빙은 코르넬리아의 평온이 깨어지는 순간을 잠시 기다릴 책임이 있다.
"아직 죽이지 않았어요."
그 남자 말이야, 나의 아버지. 당신의 남편.
넬로피는 이마와 뺨에 목덜미에 달라붙은 코르넬리아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떼어 넘기면서 속삭였다. 이런 성취는 바로 자랑하지 않고서는 참을 도리가 없다. 말하고 싶은 것이니까 잠들어 있는 귀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페넬로페는 제 입안의 혀도 뜻대로 할 수 없었던 러빙 씨에 대해 떠올렸다. 불쾌와 분노로 벌컥 쏟아지려는 목소리를 넬로피는 어렵지 않게 차단할 수 있었다. 끝없는 장미를 피워냈던, 결코 마르지 않던 물은 여전히 그녀 안에 있었다. 이어 그 앞에 내민 반쪽 사과를 먹은 것까지도 그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 붉디 붉은 사과는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구석이 있지.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여자의 탓으로 첫 인간은 원죄를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빙 씨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 말도 할 수 있었다, 말수가 극히 줄어들게 되겠지만 원래도 그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은 아니다. 손발을 휘두르지 않는 점이 좀 의아하게 여겨지기는 하겠지만. 무언가를 더하지 않고 참은 것은 넬로피의 생각에 그 남자의 몸과 또 영혼에 지분이 있다면 코르넬리아의 몫이 자신의 몫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그의 아내가 아닌가.
신 앞에서 맹세한.
넬로피는 인내했다. 코르넬리아 러빙의 인내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원래 가난한 자의 두 데나리온이 부자의 두 달란트만 한 법이다. 어머니의 몫으로 남겨 두었어요. 넬로피는 재잘거렸다. 그를 원하는 대로 해요. 이제 그녀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행할 줄 알았다. 심장을 뜯어내거나, 머리를 잘라내거나, 이 침대에 당신이 묶여 있었던 시간의 열 배 스무 배를 묶어 두는 것도 좋겠지요? 그리고나면 코르넬리아 러빙도 한 번쯤 그녀에게 말을 걸어 올 지 모르지. 귓가에서 입술을 떼어낸 넬로피는 그때에서야 코르넬리아가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무슨 짓을 했니?"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다.
넬로피는 코르넬리아를 침대에 묶은 끈을 다 흩어 두었지만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목에 음식물을 넣을 때에만 기도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으켜 앉혀지던 몸이었으므로 그녀가 스스로의 팔다리를 가누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는 희게까지 보이는 넬로피의 눈과 달리 코르넬리아는 짙은 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자라날수록 넬로피는 더더욱 아버지를 닮지 않게 되었는데, 도리어 코르넬리아가 그와 닮은 색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넬로피는 그 순간에 깨닫는다. 코르넬리아는 자기 목도 가누지 못해 누운 채 침대의 천개를 바라보면서 웅얼거렸다. 몇 년간 비명만 질러 온 목에서는 쇠창살 사이로 새는 겨울 바람처럼 탁하고 거친 소리밖에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네가 그럴 줄 알았어."
비명이 아닌 목소리를 들어 본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넬로피는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탓을 하거나 비난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아주 지친 목소리였다. 그럴 수 있어. 넬로피는 이해하려고, 납득하려고 애쓴다. '모든 게 내 의도대로 되는 건 아니야.' 그녀가 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근래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 코르넬리아 러빙은 그녀의 수양딸에게서 피와 유황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진저리를 친다. 그 몸에 배어 있을 만한 냄새라고는 짙은 장미의 냄새 뿐인데도.
"나는 알고 있었어."
"어머니."
"너 때문이라는 걸……."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복수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용서하거나, 잊어버린다거나.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 빼고요.
그러나 코르넬리아는 어쩌면 지금에서야 진정으로 남편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출생하는 순간부터 그녀의 주인이었던 아버지의 손에서 그녀를 넘겨받은 남자, 신부와 신 앞에 서서 열 여덟 살 이후 그녀의 삶을 소유했던 남자가 그녀 안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픔 뿐이라는 것을 넬로피는 아득하게 감각했다, 아무런 원인도 없고 이유도 없는 아픔이었다. 언젠가부터 온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미 향기. 넬로피는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어머니.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어요."
"나를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보내 주렴."
"나와 같이 가요, 코르넬리아."
"네게 자비가 있다면."
맑고 깊게 개어 있던 눈은 조금씩 흐려졌다. 페넬로페는 이제 다시 비명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붙잡을 수 있다면 온 몸과 온 힘으로 붙들어 놓고 싶었으나 그것이 그녀 남편이 그녀를 침대에 매어 놓은 것과 어떻게 다른지 순간 대답할 수 없어서 페넬로페는 그저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코르넬리아 러빙에게서 모든 시간이 사라지는 순간을, 끝나지 않을 고통만이 그 자리에 남는 것을. 당신을 아프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우습게도 그 고통의 얼굴이 페넬로페 러빙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면서…….
아, 어머니. 나를 혼자 남겨 두지 마세요.
* * *
넬로피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쌓인 눈의 감각은 처음에는 모래와 나중에는 진흙의 것과 비슷했다.
밤,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코르넬리아 러빙의 방에서 돌아와 창가에서 러빙 저택의 정원을 내려다보던 넬로피는 한 무리의 장미 덤불을 발견했다. 꽃도, 잎도 없이 가시와 줄기 뿐이지만 넬로피는 그게 장미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원래 이 자리에 장미가 있었던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코르넬리아 러빙이 감금되기 전에는 그녀가 원하는 꽃이 심겨졌을 것이나 그 이후로 이 정원은 러빙 가문의 저택에 필요한 취향과 유행에 따라 가꾸어지고 있었다. 넬로피는 숄 하나 걸치지 않은 나이티 차림으로 정원에 내려앉는다. 체온으로 발밑의 눈은 녹았다가도 다시 얼어붙었다. 넬로피는 장미를 하나 피워냈다. 검지 끝으로부터 붉은 꽃송이가 맺힌다.
손아귀 안에 그 만개하지 않은 꽃망울을 쥔다.
꺾이고 시드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스물 세 살의 코르넬리아 러빙에 대해서, 처음부터 자유로운 적 없던 영혼이나 비어 있는 상자를 채우는 일에 대해서. 넬로피는 꽃을 그 줄기로부터 잡아 뜯는다. 손 안에는 빛이 들지 않고 그림자가 져서 페넬로페 러빙은 마치 핏덩어리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눈으로 덮인 땅 위에서 한 마디마다 걸음 걸음 떼며 넬로피는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제아무리 날카롭게 깨어진 유리나 조각도 그 벗은 발에 상처입힐 수 없었다. 녹슨 못이 발등을 뚫고 나오더라도 페넬로페 러빙은 아프지 않았을 테지만……. 걸음마다 붉은 꽃잎이 떨어져 대신 흔적을 남겼다. 그 음률만큼은 장미 정원의 품에 있을 때에 찻잔 하나를 앞에 두고, 늦은 오후의 햇살이 드는 복도에서, 아무도 없는 계단참에서 홀로 불렀을 노래였다. 다만 이번에는, 어느 것도 지상의 언어는 아니다.
봄은 올 것이다.
눈이 녹을 것이다.
네 이야기도 끝난다.
페넬로페는 웃었다. 그 웃음 소리는 어딘가 그녀 양어머니의 것과 무척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