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xed star/싹

Last Chance

새/ 2018. 8. 2. 22:01

 마지막 기회는 언제 지나갔던 것일까.

 니콜라는 희게, 그리고 빛나던 팔을 생각한다. 나는 그때 당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왜 당신 생각이 났는지 몰라. 세상 누구라도 그 잠긴 문밖에 있을 수 있었지만 당신만큼은 거기 있을 수 없었는데. 하지만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그럴 수는 없는 거라고 다짐하면서도 니콜라는 그 다급한 손짓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불사르고 무너트리고 타오르는 소리들이 뒤섞여서 눈앞이 어지러운 중에 잠겨 있던 문이 열리고 나면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고 니콜라는 살아남은 뒤로 많은 것을 잃고 여전히 그렇게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중에도 오랫동안 궁금해했다.

 당신이었을까?

 그게 나의 마지막 기회였을까? 

 


  L A S T  C H A N C E 




 전쟁 중에는 몇 번인가 그 때의 꿈을 꾸었다. 니콜라 유제니오는 낡은 침대 위에서 일어난다. 검지손가락으로 눈가를 가볍게 훔쳐내고 마른 손이 거친 피부를 쓸어내면 긴옷을 갖춰 입고 잠든 것이 무색하게 공기가 차가운 걸 느낄 수 있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싸늘하다. 니콜라는 난로를 살피고 주전자에 물부터 올렸다. 스물 일곱 살의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식탁 의자에 앉아서 잠깐 졸면 물이 끓는 소리가 났다. 슬리퍼 한 짝이 어디 갔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어서 왼발은 맨발이다.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아마 바닥보다 발이 더 차가워서 그렇겠지. 니콜라는 이 빠진 머그에 찻통째로 찻잎을 덜었다. 부스러기를 긁으면 한 번 쯤 더 마실 수 있을 만큼 남는다. 그러고보니 크리스마스라, 어제까지는 가게가 열었겠지. 니콜라는 까쓸하게 수염 돋은 턱을 긁었다. 오늘은 아닐 거란 말이다.

 하다못해 비스킷 한 줄도 있는 게 없는데.

 찻잔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니콜라는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다를 건너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크리스마스 선물도 꽤나 끼어 있었을 거였는데, 이런저런 소포와 편지를 싣고 비행기를 띄웠던 터라 먹을 것이라고는 찻잎 몇 스푼이 다였다. 살림살이가 많은 것도 아닌 데다 한달에 절반을 넘게 비워져 있는 집에서는 묘하게 을씨년스러운 느낌까지 났다. 니콜라는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춘다. 빈 집 안에 캐롤이라도 채워 보려는 심산이다.

 빨간 리본이 묶인 두 개의 종이 상자를 발견한 건 우편함에서였다.

 일종의 집배원이라면 집배원이면서 정작 자기 우편물을 볼 시간은 없었던 거라, 우편함 속에 들어가는 크기가 아니어서 그 위에 올려져 있던 상자 두 개를  니콜라는  살짝 흔들어 보았다. 겉에는 흘려 쓴 메리 크리스마스, 집주인인 데이비스 부인의 필체다. 크리스마스에는 딸의 집에 간다고 했었는데. 하나는 무겁고, 하나는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코티지 파이였으면 좋겠는데.

 상자 두 개를 겹쳐 들고 다른 손에는 직장에서 보낸 온갖 서류 거래처의 청구서들을 그러쥔 니콜라는 오른발에 신고 있던 슬리퍼를 왼발로 바꿔 신었다. 사과파이도 좋다. 단호박도 싫지 않고. 제일은 코티지 파이지만. 니콜라는 몇 년 간 한번도 중얼거려 본 적 없는 기도문 몇 줄을 읊어 댄다. 코티지 파이, 코티지 파이.

 난로가 잘 돌아가는지 집 안에는 약한 훈기가 돌기 시작한 차였다. 사적인 편지는 한 장도 없다. 주소를 알린 사람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니콜라는 무거운 상자부터 리본을 풀었다. 크리스마스 기적인 셈 치고, 코티지 파이가 나오라고 되도않는 기합을 넣으면서. 아멘. 할렐루야. 

 "……이렇게 데이비스 부인께 하늘의 영광이 임하시는 거거든."

 땅의 평화도 찾아들 일이라고 시답잖은 소리를 중얼거린 니콜라는 대뜸 포크부터 찾아 들었다. 얼어붙은 정도는 아니지만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파이를 데울 틈도 없다. 니콜라는 미식할 줄 몰랐고 편식은 더더욱 허락된 적 없었지만 그런 중에서도 마거릿 데이비스의 코티지 파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할 수 있었다. 삽시간에 네모진 파이의 한쪽 귀퉁이, 그러니까 사 분의 일을 작살낸 니콜라는 그제야 빈 머그에 뜨거운 물을 더하면서 다음 상자의 리본을 푼다. 

 "……."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한 물건이었다. 다만 그게 소위 말하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선물이라는 걸 니콜라는 부정할 수 없었다. 먹던 파이를 씹는지 삼키는지 뱉는지 토하는지 모르고 포크를 내려놓는다. 상자에서 꺼낸다. 아. 정확히 그것이었다. 니콜라는 차마 그것을 도로 내려놓지도 집어던지지도 그렇다고 귀에 가져다 대지도 못했다.

 소라고둥이었다. 


*

 
 간밤의 꿈이 생각난 것은 그때에서다. 꿈이라는 건 신기한 성질이 있지, 눈을 뜨자마자 잃어버렸다가 벼락처럼 되살아나는 성질이다. 니콜라는 갇혀 있었다. 니콜라 유제니오만 갇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스물 일곱 명의 아이들은 불이 붙은 총성 한가운데 갇혀 있었다. 누구도 그때 그 자리에 없었다는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당시의 자료를 찾아본 다음에서야 알게 된 일이다. 국경 지대, 고아원, 실종……. 그러나 문을 열어 준 사람이 있었어. 사람? 니콜라는 이따금 냉소적인 투로, 그건 '팔'이었지 '사람'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리곤 했으나 누군가 우리 앞의 잠긴 문을 열어 준 것만은 분명했다. 전쟁 중에, 공습 때에 니콜라는 그 팔을 생각하곤 했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헤롯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묶여 잠들어 있는 베드로를 주의 사자가 깨웠다. 사슬을 벗기고 파수꾼 사이를 지나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그 문은 저절로 열리지는 않았지. 열쇠를 달라는 듯 재촉했고. 니콜라는 소라고둥을 손에 든 채 눈을 몇 번 깜박였다. 파이 하나를 다 먹어 치울 수도 있을 것 처럼 배가 고팠는데, 겨우 사 분지 일을 먹고 혀가 시었다. 니콜라는 그 때 그것이 했던 말을 빠짐없이 기억했다. 언제나 이것을 기억하라고 했다. 아무 소라고둥이나 붙잡고 속삭이라고. 십여 년. 니콜라는 제 귀에 어떤 소라도 기울인 적 없었다.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보낼 수도 보내지 않을 수도 없었고 잡을 수도 잡지 않을 수도 없었으며 따라나서지도 원망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깊은 슬픔이었다. 후회할 수가 없기에 더더욱 깊었다. 이 날 지금 이 때까지도 니콜라는 다른 방도를 알지 못했다. 눈물만이 자유로웠다. 아이들은 후회할 수 없었다. 우리는 치열했고 처절했으며 치밀하지는 못했다. 내가 후회한 것은 당신 뿐이다. 니콜라는 천천히 소라를 귀에 가져다 대었다. 바람 소리. 혹은 파도 소리. 파도의 소리는 바람이 불러 오는 것이므로, 쓸려 오고 밀려 가는 어떤 소리가 맴돈다.

 꿈처럼 니콜라는 이것이 먼저 부르지 않으면 잠잠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그저 그게 당신이었는지 궁금했다. 니콜라는 그를 믿은 적 없었다. 당신은 언제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었지만 나는 늘 퉁명스러웠고 당신을 못내켜했고 내가 당신에게 말을 걸었던 건 당신을 채찍으로 내려치거나 군홧발로 걷어차거나 뺨을 후려갈기게 되었을 그 망원경 한 쌍을 건네 주었을 때 뿐이었다. 키스하듯이. 

 유다가 그의 스승에게 키스했듯이…….

 니콜라는 귀에서 소라를 떼었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내가 주의 충실한 종도 그의 배반자도 아니듯이 당신도 누군가 보낸 천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나는, 당신을 오해했다고, 미안하다고,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지 못한 것 같아서. 한 마디 당신은 우리를 지켜 줬다고 나는 살갑지도 부드럽지도 못했지만 당신 품은 크고 안온해 보여서 한번쯤은 그냥 인사치레로 열 다섯이 되어 내가 그곳을 떠날 때 쯤에는 짧게 가볍게 지나가며 작별 인사로 한번쯤, 당신과 포옹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제가 감히 무슨 염치로 당신 옷자락이나마 붙잡아 보겠어요.

니콜라는 식탁 아래로 늘어트린 손에서 소라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붙잡지 않았으나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또한 나지 않았다. 당신일 리가 없었다. 여기서 나의 사과를 위해 당신을 불러올 수는 없는 거였다. 당신일 수는 없었다. 그 흰 팔, 아이들에게 꽃을 따다 주던, 나는 두려울 때 갇혀 있을 때 빠져 나올 수가 없을 때 그 꿈을 꾸었다. 남몰래 내가 당신처럼 되고 싶어 했던 것을 알고 있나요.

 갇힌 문을 열어 줄 사람,

 우리를 그 악몽 속에서 도망치게 해 주고자 했던 사람은, 온 세상에 당신 하나뿐이었으니까….






*사도행전 1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