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xed star/별

볕이 드는 자리에는 그림자가 지고

새/ 2017. 3. 16. 03:05


 겨울 릴 알렉산더는 머플러를 단단히 두른다.


 지난 주말 백화점에서 산 물건이었다.
 원래는 장갑을 사러 간 거였는데, 새로운 상품을 들이는 철이 빠른 가게에서 겨울 상품을 할인해서 내놓았다는 말을 들은 탓이다. 연어 샌드위치로 목요일 점심을 먹는 카페였다. 악수를 하고 짐을 옮기거나 거스름돈을 주고받으면서 손이 차다는 말은 한결같이 듣게 되어 냉증이 있다고 둘러댈 처세는 생긴 릴이었지만 점원이 다른 손님과 주고받은 이야기, 그 가게에서 샀다는 장갑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듯하면서 손에 잘 맞는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저도 그걸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 릴!"
 "안녕. 좋은 아침, 루아나."


 단어의 조합도 말하는 어조도, 무표정한 얼굴만 빼면 손을 흔드는 모양새까지 퍽 도식적인 릴의 인사에 익숙해진 여자는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었다. 난방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센터 사무실 안은 아직 싸늘하다. 어, 맨손이네. 장갑은?

 목요일 점심을 먹고 돌아와선 느닷없이 장갑을 사야겠다던 릴은 다음 날인 금요일에는 어떤 가게를 또 다음 날인 토요일에는 장갑을 검색하겠다고 유난을 부렸다. 좋게 말해도 괴짜라고 할 법한 루아나 와이트만의 직장 동료는 핸드폰으로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는 일도 낯설어했고, 그 단순한 검색을 하는 데도 센터의 오래된 컴퓨터를 붙잡고 한참를 미적거렸으므로 보다못해 그 서툰 탐색을 직접 도왔던 게 지난주의 일이다.
 이건 디자인이 세련됐고 이건 색이 잘 받을 것 같으니 가게에 가면 이것과 이것을 껴 보라고 조언까지 했는데. 머플러를 풀러 구석의 행거에 거는 손이 오늘도 차게 마른 빈손이다.


 "오늘 하고 올 줄 알았더니."


 목소리에 책망의 빛깔이 기울면 릴은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인다. 말을 고르는 것이다. 
그녀가 권유했던 장갑은 인간적인 심미안을 가지기 짧았던 눈에도 고운 빛깔이었다. 릴은 장갑을 사지 못했던 경위를 머릿속에서 정리하면서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한참을 궁리했다. 직접 보니 노랑에 가까운 밝은 갈색에서는 따듯한 느낌이 났고, 혈관이 도드라져 빨갛거나 파랗거나 때로는 보랏빛이 도는 제 손에 잘 맞을 것 같아 보였고, 일요일에 그 가게를 무사히 찾아가 혼자 둘러보겠다는 말을 어색하게나마 전해 점원를 뿌리치고 권해준 장갑을 찾아 만져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었지만, 루아나가 짐짓 상심한 어조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면 혀가 굳는다.


 "못 샀으니까."


 단단히 여몄던 머플러와 야상을 벗어 건 다음에는 제 것인 캐비넷에서 덧입는 작업복을 꺼내면서,
 릴은 머릿속에 떠올렸던 여러 단어들을 묶어내지 못하고 끝의 말만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살갑다고는 못할 그 말투에 딱히 악의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은 아는지라 와이트만은 별다른 질문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다만 릴은 혼자서 모르게 조용히 뱉어내지 못한 말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진다.

 개어진 모양대로 뻣뻣해진 작업복 속에 꾸역꾸역 몸을 집어넣는다.

 여닫을 때마다 끽끽 소리가 나는 그 철제 캐비넷에는 서투른 글씨로 릴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얼마 전에서야 릴은 그 녹슨 소리를 가장 작게 내면서 캐비넷을 여닫는 요령을 깨달았는데, 알고 있어도 세 번에 한 번은 꼭 듣기 싫은 소리를 긁고 말았다.
 배우고 익숙해져서 손에 익혀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손잡이가 손끝에 닿는 감촉이 싸늘하다. 릴은 새삼스러운 한기를 느꼈다. 


 "아직 추우니까 손 좀 녹이고 가."
 "그럼 점심 전에 끝낼 수 없다."
 "오후에 하면 되잖아."
 "……."
 "조금 미룬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릴."


 고개를, 
 저으며. 릴은 일어났다. 손이 찼다. 그래서 장갑을 사려고 했던 거긴 했었지.

 그런 마음이 드는 것부터가 드문 일이기는 했다. 인간의 삶은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뭔가를 가지는 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떤 물건을 돈을 주고 사서 소유한다는 건 무엇보다 인간적인 행위라서 릴에게는 영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그 익숙하지 않은 일이 사방에서 벌어지는 백화점이라는 장소도 꺼려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그건 평소답지 않은 충동이었다. 비유하자면, 물에 처음 들어간 개가 사지를 허우적대는 것과 별다르지 않은 모양새다.

 조금 미룬다고 죽지 않게 될까.

 릴은 자신이 천천히 그리고 차근차근 인간의 말과 일에 젖어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그건 느닷없이 바닥 없는 수조에 내던져진 것에 더 가까웠다. 모래사장도 기어 본 적 없는 뱀에게 깊은 물이 들이닥치면 도리 있나, 그러나 릴은 어렴풋이 그게 자신이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라고 느꼈다. 손발 딛을 곳 없는 물속에서 사지를 허우적거리는 일, 반쯤은 의무적이이었고 나머지 반의 반쯤은 지루했으며 그 나머지는 진절머리나는 것이더라도. 

 릴은 고개를 젓고, 일어나서 사무실 문을 열었다. 릴이 오전 일과는 보호 중인 동물들의 축사를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차가운 작업복 속은 이미 벗어낸 허물을 뒤집어쓴 것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그 머플러.


 장갑 대신 산 그 머플러는 어딘가 조금 낡아 보이는 감이 없잖은 물건이었다. 중고까진 아니더라도 가게의 창고에서 꽤 오래 있었던 게 분명하다. 다만 차갑게 미끄러지는 가죽보다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고 가는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오래된 빛을 먹은 천의 감각.
 그래서. 차디찬 맨손은 그래서다. 특별할 것 없는 그 머플러가 유난을 부린 장갑 대신 새로 산 물건이라는 것까진 알아채지 못한 와이트만은 해가 높을 즈음 사무실로 돌아와 오전에 처치한 일과 아닌 것들과 동물들의 상태를 기록하기 시작한 릴의 표정 없는 얼굴을 내도록 살폈다. 신통하게 대답한 적이 없으니 부러 묻지는 않지만 궁금하기는 하다는 무언의 시위다. 릴 알렉산더에게 그걸 알아볼 만한 눈치가 있었으면 그런 궁금증이 생겼겠느냐마는.

 사무실 안에는 특별히 릴의 것은 아니지만, 릴이 독차지하곤 하는 낡은 소파가 하나 있었다. 철제 책장과 쓰지 않는 캐비넷 사이에 처박힌 소파에 소파처럼 처박혀서 릴은 동물들의 차트 하나하나를 넘겼다. 어린애 같은 글씨. 스펠링도 꼬박꼬박 틀린.


 "레몬은?"
 "또 물어봐?"
 "어디에 있나?"
 "늘 있는 곳에 있지."


 와이트만은 열두 시가 된 직후에 의식처럼 행하는 이 대화가 여전히 낯설었다. 레몬이 센터에 온 이후 릴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녀에게 레몬의 행방을 물었다. 가끔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잦게 드러나는 릴 알렉산더의 기묘한 비인간성을 성격으로 치부할 수 있게는 되었지만, 와이트만은 바닥까지 솜이 꺼진 소파에 구겨두었던 몸을 일으키는 릴의 기척에 귀를 세운다. 

 릴은 대화를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피한다고 봐도 좋다. 꼭 필요한 말을 빼면 늘 하는 말, 안녕, 좋은 아침, 루아나, 레몬은? 안녕, 내일 봐, 루아나. 늘 그 자리에 있는 레몬을 매번 물어보는 것에서부터 고집스럽기는 다섯 번은 겹쳐 묶은 매듭처럼 고집스러웠고 어지간한 농담도 받을 줄을 몰랐다. 모르는 것은 물어봐야 한다는 걸 가르치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지. 말을 하려다가도 열에 아홉 번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고, 그렇게 입을 다물면 절대로 열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그 레몬색 뱀의 행방은 매일같이 어찌나 그렇게 궁금해 하는지. 


 "점심은 어떻게 할 거야?"
 "준비했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릴 알렉산더의 점심 일과는 레몬을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굵기는 엄지손가락, 길이는 손끝에서 팔꿈치 정도인 작은 뱀이다. 레몬의 케이지로 가서 한참을 쳐다보다가, 먹이를 줘야 하는 날에는 먹이를 넣어 주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지켜보다가, 날씨가 좋거나 기분이 좋을 때는 손에 잠시 감아 보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처음 레몬을 봤을 때에 비하면 아주 드물어진 일로 이내 점심을 먹으러 일어난다. 화요일과 목요일을 제외하면 하루 빠짐없이 집에서 만들어 온 런치박스다.

 돌이켜보면 오싹한 구석이 없잖았다. 릴은 지난 주 월요일과 똑같이 일했다. 그 전 주에도.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같은 말로 된 인사를 하고 오전 일과를 한 다음에는 레몬을 찾는다. 바뀐 적 없고 틀어진 적 없이. 불쾌할 만큼 한결같았다. 오전의 일과로 조금 지쳤는지 팔을 늘어트리고 걸어가는 릴의 뒤통수를 쳐다보다가 처리해야 하는 이송 건으로 관심을 돌리려던 와이트만은 소리 없는 한숨을 쉬고는 릴의 등에 대고 툭 말을 던졌다. 릴. 좋은 소식인데.


 "내일은 머피가 온대. 아까 연락이 왔어." 

 옛날 기록 중에 필요한 게 있다나. 릴 알렉산더는 돌아본다.


 표정이 다양하다고는 하기 어려운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게 분명히 기쁨이어서 와이트만은 어김없이 혼란스러워졌다.
 물정을 모르고 서투른 주제에 고집은 기가 막히게 세면서 납득할 때까지 물러설 줄을 몰랐지만, 릴은 천성이 사납거나 차갑지는 않았다. 몇 번이나 만났다고 정이 붙었는지 은퇴한 사육사 머피가 가끔 센터를 찾을 때마다 저런 얼굴을 한다. 평소의 감정표현에 비하면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모양새로 기뻐하는 수준이다. 환호를 지르거나 웃음을 짓지는 않았지만 몇 개의 들뜬 발걸음과 움찔대는 입술의 방식으로 릴은 기대를 표했고, 와이트만은 턱에 손을 괴고 손을 내저었다. 이해하고 살아야지 어쩌겠니. 레몬한테나 가 봐. 

 익숙해 질 만큼은 봤는데도. 와이트만은 의자에 등을 깊게 눌렀다.

 릴 알렉산더는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치수가 맞지 않는 옷에 제 것 아닌 신발이라도 신은 사람처럼. 릴 알렉산더와 잠시 동안 공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와이트만은 불필요하게 불편해졌다. 릴에게는 그런 구석이 있었다, 와이트만은 그 이질감을 어떻게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레몬, 문 밖 복도 너머에서 사람을 부르듯 하는 릴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오면 문득, 그만.


 "머피가 와, 레몬."


 매일같이 찾기 때문에 레몬의 케이지는 수면실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와이트만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잠이 잦은 릴의 물건이 야금야금 들어와 있는 곳이다. 릴이 몸에 몸을 묶으면서 둥글어지곤 했던 케이지에 비하면 레몬의 케이지는 훨씬 작았다. 손가락만하고 팔뚝만한 뱀에게 큰 케이지가 필요하지는 않겠지. 그래서 릴은 레몬을 찾느라 케이지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었다. 레몬은 숨을 곳이 없다.


 "머피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머피를 알지."

 중요한 건 그거야, 레몬. 내가, 안다.


 월요일의 일과, 오후의 것을 되새기면서 릴은 레몬의 케이지 앞에 앉아 평소보다 시간을 조금 더 보냈다. 뱀이었을 적에는 어제와 오늘의 다름을 신경썼던 적이 별로 없었다. 변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란 불확실한 개념이었고 삶에 필요한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면 먹을 것과 입을 것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릴은 지루해지고 말았다. 인간이 가르친 것 중에 그게 가장 성가셨다. 지루한 것은 도통 참기가 힘들다. 넌 모르지, 레몬. 하지만 내가 주지 않으면 너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잖아.


 이런 생각은 '비겁한' 거지.


 내일은 다르다. 머피가 오는 것은 특별한 일이고, 내일은 특별한 화요일이 될 것이다. 릴은 기대했고, 들뜨기도 했다. 비겁하다는 생각에는 조금 풀이 죽었다. 퍽 인간다워. 릴이 케이지 앞을 떠나기까지 레몬은 제 몫의 나뭇가지에 칭칭 감긴 채로 눈 한 번을 깜박이지 않았다.





 화요일 새벽이 되었을 때 릴 알렉산더는 그가 해야 하는 일을 깨달았다.


 루아나 와이트만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다. 심한 감기에 걸렸어요. 오늘은 출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새벽에는 전화를 하지 않고, 출근을 할 수 없을 만큼의 감기에는 심하다는 말을 더한다. 겨울이었으므로 릴은 난방에 신경을 썼다. 모든 종류의 기계 특히 뜨거워지는 종류의 기계에는 도무지 익숙해지기 어려웠지만 보일러만큼은 만약의 사태에 응급처치쯤은 할 수 있는 정도로 원리를 익혀 둔 터였다. 릴에게 추위는 아직도 사소해지지 못했다. 그건 어쩌면 영원히 사소해지지 않을지도 몰랐다. 릴은 메시지가 잘 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불 속에 몸을 웅크렸다. 집안은 따듯했다. 추위의 문제가 아니다.


 "……."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찰나 후에 붉은 꼬리가 이불 밖으로 새어나왔다가, 도로 빨려들어간다. 허물벗기가 아니면 감기일 것이다. 정확히 날짜를 세어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허물벗기라면 지나치게 이르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몸이 낯설다. 릴은 낯선 살갗 아래에서 마음이 뭉그러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작은 뱀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도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침대가 묵직하게 들어가고 몇 번을 감아도 감을 꼬리가 남는 길이였다. 뱀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은 지난 허물벗기 이후로는 처음이었으므로 릴은 그에게 충분한 온도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인간이 아닌 것들은 인간이 조금 늦는 것으로도 죽을 수 있다. 


 릴, 듣고 있어? 많이 아프니?


 혹시 쉿쉿거리면서 이상한 소리를 낸 것은 아닐까, 하고 릴은 혀로 자기 입술을 더듬었다. 손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꼬리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추울 일을 하진 않았는데, 감기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엄밀히 사람의 몸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렇게나 추위를 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릴 알렉산더는 이제 뱀이 아니었다. 두 발로 걷고 손으로 사람의 말을 쓰고 카페에서 연어 샌드위치를 먹는다. 장갑은 사지 못했지만, 
 뱀의 말을 해 버렸다면 와이트만은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거였다. 들키면 안되는데. 케이지 안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레몬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아듣지 못하게 된 주제에 꿈이 컸다, 남자의 목소리. 괜찮다니 다행이야.


 찾아 올 사람은 있나? 머피네. 아프다고 해서.


 전에 본 적이 있지? 에이프릴은 물론 버려진 뱀을 구해 준 사람을 기억했다. 


 해가 기운다. 

 밤 아직 겨울 땀에 젖은 침대 위에서 홀로 릴 알렉산더는 깨어났다. 손 옆에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다. 남아 있는 통화 기록으로 와이트만과 전화를 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여덟 시간도 전의 일이었다. 하루를 내리 굶고 정신을 잃는 모양으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비몽간에 릴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해서 머피가 전화를 바꿔 들고 혹시 심하게 아픈 것은 아닌지 계속 말을 걸어 상태를 확인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쉬도록 해. 사람은 앓을 때가 있다.

 이상하지.


 사람이어야지, 
 앓을 때에 제 입에 약을 넣을 수도 있었다. 보일러 온도를 올릴 수 있는 것도 사람이었고, 아침마다 샌드위치를 엮어 작은 상자에 넣어 점심을 삼을 수 있는 것도 사람뿐이다. 그런 주제에 앓기도 하나. 허물을 벗지도 않는데, 추위에 정신을 잃는 것도 아닌데.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눕지도 못한 채 그저 누워서 천장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릴 알렉산더는 그건 아마 사람의 습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홀로 위대하고 영영 외로운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릴은 차게 식은 사실은 열이라고는 하나 오르지도 않았던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의 새 머플러를 떠올렸다. 뱀으로 남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문득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릴 알렉산더의 오래된 새 머플러는 알렉산더의 집 바닥의 카펫과 감촉이 비슷했다.
 언젠가의 기억에 알렉산더는 따듯하게 볕이 드는 날이면 릴을 꺼내서 카펫 위에 놓고 손장난을 쳤고 릴은 카펫이 담뿍 빨아들인 빛이 그의 비늘 사이로 스미는 것을 느끼면서 머리를 손 안에 뉘였다. 그 한숨이 나올 만큼 따듯하고 부드러운 기억,


 "말도 안 돼."


 그건 아마도 사람의 말이었다.

 릴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입술을 움직일 힘 공기 중에 소리를 뱉을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직도 많은 단어를 알지는 못했다. 쓸 줄은 더더욱 모른다. 의미 역시 쉽게 헤아릴 수 없었다. 릴의 입속에 수많은 단어가 담겼다가 혀를 할퀴고 삼켜졌다. 릴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그 날들을 다정하게 기억할 순 없었다. 릴 알렉산더는 스스로의 삶을 주관하길 원했다.


 이렇게나 자유롭고,
 외로울 줄은 몰랐지만. 

 장갑 속에서 얼어붙어도 좋다고 으스댄 기억이 어렴풋했다. 식탁 의자의 등받이에 걸쳐져 있을 그 머플러, 뱀에게는 없는 두 다리를 두 팔을 침대에 늘어트린 채 릴 알렉산더는 그 머플러를 떠올렸다. 버려야 하나. 다 버려야 살 수 있나. 그래서 알렉산더는 나를 버렸나. 사람은 너무도, 릴이 선택한 삶은 너무도 자유롭고.


 그래서 릴 알렉산더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슬픔이 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