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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롭 에필로그 Counting Stars
새/
2017. 1. 23. 13:57
어느 사랑이 의문을 품었소 강물이 돌을 두드려 깎으면 언제쯤 보드라운 모래가 되는지
돌은 모래가 되어도 사랑은 사랑은 여전히 강물 같을지 아니면 바스라져 흘러가 버릴지
흘러가 볼테냐 사랑아 부딪쳐 모래가 되도록 오래간 누구의 손에도 머물지 못할 긴 시간을
그러자 사랑이 두려워 말하길 바다에 다다르면 무엇이 됩니까 우리들 그때에도 사랑이겠습니까
바위가 강물을 휘감고 웃으며 누군들 알겠니 사랑아 가련한 슬픔이 될는지 무엇도 없을지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 시인이 노래를 불렀네 사랑의 노래를 그래서 사랑은 어떻게 되었나
모래가 되었나 슬픔이 되었나 그래서 우리들은 어떻게 되었나 바스라졌는가 흘러갔는가
Counting Stars
남자는 다리를 앞두고 서 있었다.
비참한 모습이었다. 다리는 굳건히 서 있을 힘이 남지 않았는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왼팔은 조잡하게 꾸민 부목을 대고 있었으며, 핏자국을 채 닦으려는 시도도 하지 못한 듯한 옷가지를 불쾌한 줄도 모르고 걸친 채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나마 그가 몸 위에 걸친 것들이 그가 가진 것 중에서는 가장 그럴싸한 모양을 한 것들이라 할 법했다. 병장기나 옷가지들은 절망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지칠 줄도 모르고 다시 자라난 수염이 남자의 얼굴을 덮으려 하고 있었으나,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다. 수천의 적을 베고 수만의 칼에 찔린 자의 얼굴로 남자는 중얼거렸다. 이 밤 친애하는 자들을 잃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하겠다마는.
"세상이여, 듣고 계십니까."
잠겨 있다 드러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다리의 아래에는 아직 완전히 줄어들지 못한 물길이 흘렀다. 남자는 천하에 고하는 말이라기에는 너무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분노로 일어나시오. 속삭임은 나직하여 연가인 것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저주로 뒤채고 원망으로 넘어트리시오."
남자는 그가 잃은 것을 생각했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어쩌면 가진 적도 없었으므로 그의 발치에서 서성이는 상실감은 그에게 속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심성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손에 스쳤던 것들을 상기시켰고, 남자는 돌이킬 수도 없이 사라진 것들을 되새겨야 했다. 대개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웃음, 남자는 입술을 끌어올려 웃는 표정을 만들어 본다. 이것은 웃음이 아니다. 그는 웃음을 결벽하게 재단했다. 그 기준이라면 삶에 다시는 웃음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시 웃음이 찾아올 것을 알았으며, 그 알량한 미래를 잃어버릴 수만 있다면 물에 몸을 던질 수라도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당장에라도 세상을 찔러 죽일 것 같은 흉흉한 표정으로 오른손의 주먹을 쥔다.
"내게 삶을 준 분은 이제 없으나 이 삶을 거둘 분은 계실 것이 아니오."
그러나 윈스롭은 죽음을 보지 못한다.
칼로 오르크의 후려치고 와르그의 머리를 가르는 중에도 죽음은 그에게 시선 한 번을 던지지 않았다. 윈스롭은 부목을 댄 왼팔을 감각해 본다. 왼팔은 그의 방패였다. 부러졌으나, 짧은 시간은 아니겠지만, 윈스롭은 그의 팔이 나을 것을 알 수 있었다. 아픔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그에게 삶이 아직도 길었다. 부러진 것이 팔이 아니라 목이었다면……, 윈스롭은 비겁한 상상을 한다. 홀로 누운 밤중에는 머리를 빗어 줄 것처럼 곁에 눕곤 했던 죽음이 전장에서는 한 번을 모른 체했다.
윈스롭은 파리하게 질린 채 발을 디디고 버텼다. 무너지기를 허락받은 자리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서 있어야 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전장에 있었고, 매번이 아프고 슬프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은 매끄러워지고 무디어져 미끄러지듯 사라져야 했는데…….
시간은 슬픔을 모르고 흘렀다. 윈스롭은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슬픔을 알았으면 세상은 오래 전에 스스로를 묻었을 것이다.
남자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소.
볼을 부풀리고 부루퉁한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스테오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빈말이라도 아니라는 대답을 재촉하는 것 같은 말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윈스롭은 무안해져 돌아보지도 못하고 머리만 긁적였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열아홉의 병력이 정예라는 이름으로 차출되어 길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스테오르는 윈스롭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린다. 오랜 전장에서 살아남았다면 그것으로 정예라고 할 만 하지. 떼쓰는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정말로 물정 모르는 어린애처럼 스테오르를 들볶고 싶지 않았으므로 윈스롭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십육세를 지내면서 접어든 세상의 다른 첩경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고 살인이 끊이지 않았으나 이번의 것이 유다르다는 것을 윈스롭이라고 모르지는 않았다. 악이 날로 기세를 드높였으며 전장에 마땅히 휘날려야 할 기개와 분투보다는 지리멸렬한 인내가 겨우겨우 발을 묶어 두고 있지 않느냐고, 윈스롭은 듣는 이 없는 질문을 던진다.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이 그의 의문을 듣고 있었다. 기개 잃고 떠밀려 가는 남자는 무리 속에 섞여 전방을 향하고, 소리 없이 운명들을 조롱하는 말들을 지껄였다. 윈스롭은 연약한 혐오를 느꼈다.
"열아홉이나 무리를 짓더니 하는 일이라는 게 고작 소풍인가?"
인간들은 지치지도 않고 걸음을 내딛곤 했다. 끝없이 무언가가 되기를 소망했으므로, 새롭고 다시없을 것 같으나 언제나 있어 왔고 똑같은 실패를 계속해왔던 바로 그 한 걸음을 내딛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선하지도 의로우지도 못한 인간들은 짧은 삶에서도 끊임없이 욕망하며, 그들의 아버지가 지나간 아들들이 지나갈 위대한 길옆에는 수 없는 무덤을 남기지. 식어빠진 웃음으로 몸을 두른 채 무장을 준비하고 말에 오르면서 윈스롭은 다짐하듯이 되뇌었다. 모든 별의 운명은 초라하고 무관심하다고.
우리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빛이 나는 체를 하고 있다고.
이름 모를 환상과 이미 죽은 자의 모습들이 덮쳐 오는 별의 요새에서 윈스롭은 그러나 지쳐 무뎌져야 마땅했을 통증과 공포에 맞딱트렸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자신에게 찾아오는 시체로 덮여 발 디딜 곳 없는 황량한 땅의 환상에는 소리가 없었으나 그가 어느새 애틋히 여기게 된 사람들은 상처를 입으면서 슬픔에 물리고 절망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입술을 열었다. 비명은 도리어 드물었으므로 윈스롭은 귀를 기울여야 했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었다. 윈스롭은 오래 전에 놓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되새겨야만 했다. 사람들과 요정들은 연약하고 아름다웠으며 마땅히 사랑할 만 하다고. 무용한 부정 속에 도리 없이 인정하면서.
별을 이야기해 주시오. 무력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오. 그리하여 윈스롭은 누군가의 귀에 스쳤을지 모르는 외침을 소리 높였다. 불타오르시게, 별들이여. 부디 꺼질 줄을 모르고 위대하시오.
그러나 뒤따를 수 없는 곳으로 가지 마라.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일곱 개의 낮과 일곱 개의 밤이 지나간 후
열 일곱 명의 사람들이 길 앞에 섰다.
한 명의 병사가 일생에 보아도 좋을 지도자의 수를 훌쩍 넘는 수의 사람들이 원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윈스롭은 품은 악의를 지친 목소리로 둘러 감춘 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지껄였다. 두 번째 원정대인가? 아니면 그것을 끼고 나가 싸우기라도? 얼토당토 않은 착각임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들풀도 저가 뿌리 내린 곳은 모르지 않을진대 급류도 아닌 물살에 휘둘려 쓸려 무지하고 비천한 삶을 연명해 온 남자가 노래가 될 리 없지. 그러나 윈스롭은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오래 된 상처를 매달고 있는 다리가 이제 와서 말썽일 리 없는데도. 그리고 마침내,
부딪친 작은 사람의 형체를 돌아본 윈스롭은 팔란티르를 통해 보았던 얼굴을 알아보았다. 흰 옷 입은 노인과 말을 나누던 키 작은 여인의 얼굴을, 윈스롭은 그녀가 파라미르와 마주하는 것을 스쳐 보았고, 그 낯선 이목구비를 꿈에서 보아 온 것처럼 깨달았다. 윈스롭은 손을 뻗으려다가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잠시만…….
아마 그 말은 윈스롭의 입술 바깥으로 내밀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문이 닫히면 불만과 불평밖에 늘어놓아 본 적 없는 남자는 홀로 남았다. 그 짐짓 애달픈 부탁을 들은 이가 아무도 없었으나 이번에도 윈스롭 자신만은 스스로의 감추어 두었던 소망이 움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지쳤고 믿음을 잃었으며 눈 앞에 들이닥치는 불행마저도 받아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갈 곳 모르고 헤메던 방랑이 어디에는 멈추어서 뿌리를 내리는 시늉이라도 하고 내일을 꿈이라도 꾸고 행복을 깊은 곳에서 캐내기라도 할 시간임이 분명했다. 돌아갈 곳이 없다고 끊임없이 흐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내 방랑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가 했던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이번 일이 끝나도 목숨이 붙어 있다면 전장을 떠나겠다고 했던.
"노래를……."
그러나 나를 함께 가게 하시오. 윈스롭은 마음 구석에 불쑥 솟아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막기는커녕, 돋은 것이 갈비뼈 안쪽을 찌르며 자라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돌아선 채 오랫동안 걸음 떼지 못하고 윈스롭은 문을 열지도 자리를 떠나지도 못했다. 동료들이 저마다의 길을 향하는 동안 닫혀 있는 문을 그저 바라보면서, 내게 노래를 부르게 하시오, 윈스롭은 그 비겁한 소망마저도 끝을 맺어 말하지 못했다.
찾아올 그 어떤 봄과 아침보다 소중한 슬픔이 당신께, ……우리에게, 남게 될 겁니다.
그래서 윈스롭은 그가 예고했던 슬픔이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먹먹한 가슴이 말을 잇지 못하고 한없이 서러워지는 순간을 슬픔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말하랴. 소중하여 차마 털어내거나 밀어내지도 손끝으로도 건드리지도 못해 그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고 마는 슬픔이었다. 포기하고, 용서하며, 잊어버리는 우리 인간들은 이 가슴 저려 갈 곳 잊을 슬픔마저도 언젠가는 말려 죽이고야 말겠지만…….
지금만큼은 슬픔으로 눈물짓게 하라고. 윈스롭은 일그러진 얼굴을 손 안으로 숨겼다. 해가 밝았다.
수치를 느낄 겨를도 없이 통증이 온 몸을 물어뜯는다. 그는 젊지 않은 병사였다. 전장에서의 일 년은 다른 일 년들과 꼭 같지 않아서 윈스롭은 그의 나이에 예정된 삶보다 더 많은 것을 당겨 쓴 셈이었다. 손 안에 고여드는 척척하고 서글픈 것들을 모르는 척 윈스롭은 고개를 들었다. 시간은 슬픔을 몰랐고 그가 모르는 곳에서 영원히 모를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떻게 되었나.
홀로 선 남자는 그게 영영 끝을 알 수 없을 노래가 될 것임을 알았다. 그는 검을 내려놓고 절뚝이며 지친 몸을 또다시 한 걸음 떠민다.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슬픔은 안은 채로, 그러나 바로 그 한 걸음 내딛기를 멈추지 않고,
밤이 몸을 뒤틀며 또다시 슬픈 해를 해산하여 끝도 없이 다시 아침이었다.